<분수대>고액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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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23년 10월말 미 뉴욕 타임스지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현지취재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최악의 상태로 치닫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베를린의 최고급 식당에서 몇몇 외국인들이 「자랑스 럽게」 미화1달러를 미리 내고 식사를 주문했더니 먹고 남을 만큼 푸짐한 식사를 가져다 주더라는 것이다.실컷 먹고 일어서려는데 웨이터가또 식탁에다 요리를 잔뜩 갖다놓더니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식사하시는 동안 달러값이 또 엄청나게 올랐습니다.거슬러드려야 불편하실테니 요리를 더 드시지요.』 당시 미화 1달러는2백만 마르크에서 3백만 마르크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한데 최고액 화폐인 1만마르크짜리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줄 모르니 자연 1천마르크짜리가 유통의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가령 1백만 마르크를 거슬러 받는다 면 1백장 묶음 열다발이 되는 것이다. 고액권이 등장한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4백만 마르크의 지폐로 시작해 거의 매일 단위가 높아졌다.해가 바뀐 후에는 50조짜리 주화와 1백조짜리 지폐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당시의 정부대출이 1백조 화폐로만 49만7천장에 달했으니 인플 레이션규모를 짐작할만 하다.「제로(0)발작」이니 「숫자병」이니 하는증세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20년대의 독일은 특별한 경우지만 어쨌든 고액화폐는 인플레이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80년대까지만 해도 1백만단위 화폐를발행했던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 등 남미의 몇나라들이 좋은 예다.하지만 인플레이션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 니라면 고액권발행이 꼭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대중유통되지는 않지만 미국에서도 1만달러짜리를 발행하기는 한다.우리나라의 경우1만원권이 첫선을 보인지도 23년이나 됐다.73년 당시의 대졸초임이 4만5천원이었던 점을 감 안하면 약 20분의1로 평가절하된 셈이다.1만원짜리 화폐보다 10만원짜리 수표가 더 흔하다는 것도 문제고,한번 쓰고 버리는 수표의 관리비용만 해도 10년간의 의무보관비를 포함,지난해 경우 6천억원이 넘는다니 간단치 않다■물론 한은측 이 내세우는 과소비.물가인상 등의 우려도무시해버릴 수만은 없지만 신중하게 고려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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