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韓經硏 거시경제 소장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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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들은 기 빠진 수험생이다. 주변에서 워낙 간섭을 많이 하니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까만 고민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센터 허찬국(許贊國.50.사진)소장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간하는 '나라경제' 5월호에서 "수험생(기업)의 눈 앞에는 힘껏 뛰어놀 수 있는 중국 놀이터가 어른거리고 다시 태어나면 죽어도 (한국) 학생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고 쓴소리를 하고 나섰다.

許소장은 7일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경제지표를 분석하고 기업인들을 만나다 보면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들어 그런 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정부가 균형 감각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노사 문제에선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 기업에 대해서만 투명성을 높이라고 채찍질한다는 얘기다. 그는 요즘의 기업상황을 수험생에 비유했다. 공부 잘하게 한다고 친척과 친지들까지 몰려와 달달 볶아봐야 정작 공부할 학생이 의욕이 없으면 성적은 안 오른다고 꼬집는다.

그는 기고문에서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것은 선의의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투명성을 높이면 (기업 수익과 가치가) 다 좋아질 것이란 기대는 순진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체 운동(노동시장 유연성)은 하지 않고 상체 운동(기업 투명성)만 강조하면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수험생(기업)을 괴롭히는 데는 정치권도 빠지지 않는다. 許소장은 "대선자금 수사가 정치와 경제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기업인들은 '정말 돈을 안 줘도 될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정치란 것은 판을 뒤엎고 울고불고 소란스러워야 뭐가 되는지 모르겠으나 경제는 기본적으로 그런 식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싫어한다"고 지적했다.

許소장은 현 시점에서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일자리를 늘려 내수기반을 다지고 잠재 성장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기업이 더 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 규모는 700조원에 이르는데 상장회사의 시가총액은 400조원에 못 미치는 현실을 곱씹어 보라는 충고다. 1993년 17.2%였던 종업원 500명 이상인 대형 사업장 비중이 2002년 절반 수준으로 준 것은 대기업일수록 더 심한 노사 갈등을 겪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가뜩이나 한국의 임금 근로자 비율(30%)이 선진국(미국 45%, 일본 42%)보다 적은데 기업들이 떠나서 일자리가 줄면 영세 자영업자가 늘고, 임금 근로자가 부담해야 할 사적.공적 부담이 커지면서 임금인상 요구가 더 거세지고 해고는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빚어진다는 얘기다.

그는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앞으로 우리나라는 사람을 많이 쓰지 않는 몇 개의 대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로 꽉 찬 경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許소장은 "기업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라며 "좋은 제품을 값싸게 만든다는 기업 경쟁력의 원천으로 돌아가면 근로자나 주주 모두 이익을 본다"고 말했다.

한경연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소로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許소장은 조흥은행 행원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유학, UCSB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2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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