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과 주말을] 형제 중 가장 사랑했던 오빠가 자살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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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더링』

앤 엔라이트 지음, 민승남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336쪽, 1만2000원.

 각종 실용서를 속독하는데 익숙한 독자라면 10장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흡입력 강한 문체로 유혹하지도 않고, 손에 땀을 쥐게 하지도 않는다. 언뜻 보면 진부하다. 독자들이 느낄 이런 기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소설 중반부에서 작가는 주인공 베로니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제 오락가락하는 이야기들과 백일몽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다. 로맨스는 이제 접어 두고 내가 여덟 살, 리엄이 겨우 아홉 살이었을 때 에이다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 자, 여기서부터 소설은 다시 시작한다.

오빠가 죽었다. 12명의 형제 중 가장 사랑했던 오빠 리엄이다. 그것도 자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를 그리워하는 베로니카만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이야기를 상상한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사실’은 단 하나의 사건뿐. 그 외의 이야기들은 ‘불경한 상상들’로 채워질 뿐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그 사건’ 때문일 거라고. 그렇게 그녀는 가족에 대한 증오, 비난, 의미 없는 섹스, 개인의 붕괴를 차분하게 폭로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정하기 거북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며, 우리는 자주 가족을 좋아하기보다는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또, 개인을 붕괴하는 것은 종종 아니 자주 가족이라는 것을.

하지만 역시 깨닫게 된다. 그것을 복원시키는 것도 다시 가족이라는 것 말이다. 베로니카의 딸 레베카가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엄마한테 해줄 말이 있어. 그 말은 사랑이야.” 그녀는 이제야 ‘오락가락하는 이야기들’에서 벗어나 다시 땅으로 안착할 수 있다.

“호텔로 돌아가고픈 유혹이 너무도 강하지만 나는 억지로 출국장에 앉아서 체크인 카운터로 갈 때까지는 목적지를 정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집 말고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임을 안다.”

아일랜드의 이름없는 작가였던 앤 엔라이트(Anne Enright)는 이 작품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맨부커상 수상시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천천히 읽고 다시 한 번 읽을 때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는 소설이다. 아일랜드를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역사와 정서를 알고 본다면 섬세한 문장 하나하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원제 『The Gathering』.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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