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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용어 한글화 이뤄져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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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어릴 적 우리 집 개 이름은 '꽃순이'였다. 당시 한글 사용이 곧 국가 사랑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원래 이름인 '메리'를 한글 이름 '꽃순이'로 바꾸었다. 되돌아보면 한글 전용을 강조해 순 한글 이름이 유행하기도 했고, 한자 혼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따라 상용한자의 수가 늘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국어 교육 정책과 맞물려 각 분야의 용어도 변화를 겪어 왔다. 수학의 예를 들면, '대각선'은 '맞모금'으로, '평행사변형'은 '나란히꼴'로 한글화됐지만 모두 원래의 한자 용어로 돌아왔다. 그에 반해 '제형(梯形)'과 '능형(菱形)'은 각각 '사다리꼴'과 '마름모'로 한글화한 뒤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 순한글 의미 전달 쉬워

순 한글 용어는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쉽다. 한글화에 적극적인 북한의 용어를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최빈수(最頻數)'를 '가장 잦은 값', '공집합(空集合)'을 '빈 모임'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한글 용어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순 한글로 표현하면 '진동(振動)'을 나타내는 북한 용어 '떤다'와 '교선(交線)'에 대응되는 북한 용어 '사귀는 선'에서 보듯이, 일상적인 의미와 뒤섞여 학문 용어로서의 독립적인 의미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용어가 전문가 집단에서만 공유되는 '그들만의' 은어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되려면 친숙한 한글 용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한글 창제 원리의 과학성은 해외에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몇 년 전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한글은 가장 우수한 문자이며, 한국의 문맹률이 낮은 이유는 한글의 조직적인 체계성 덕분이라는 논문을 싣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이 된 데는 정보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컴퓨터와 잘 어울리는 한글도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한자와 달리 한글은 컴퓨터에 입력하기가 아주 간편하고, 또 휴대전화 자판에서 보듯이 천지인(.─│)의 조합으로 모든 한글의 모음을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용어의 한글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현재 사용되는 대부분의 용어가 한자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한자로 된 용어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수직선(數直線)과 수직선(垂直線) 같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 한자 용어인 삼두박근(三頭膊筋)을 한글로만 익히면 무의미하게 외워야 하는 용어이지만, 한자를 알면 '머리(頭)가 세 개(三) 달린 어깨(膊) 근육(筋)'이라는 뜻을 풀어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용어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한자에 대한 소양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 한자 장점 살려 점진적으로

사실 표의문자인 한자를 배우면 어휘를 효율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전(電)을 배우면 여기서 파생되는 전기(電氣).전자(電子).전파(電波) 등 많은 어휘를 학습할 수 있다. 한편 한자에 담긴 뜻을 음미하는 과정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예를 들어 立+木+見으로 구성된 친(親)에는 나무(木) 위에 서서(立) 자식이 돌아오는지 바라보는(見) 어버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한글 전용, 한자 혼용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정당화 논리를 가지고 있기에 선뜻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이 주장들을 포용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용어는 가능한 한 한글화하고, 현존하는 한자 용어는 한자와 더불어 뜻을 가르치되,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를 포함한 용어는 점진적으로 한글화하는 절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