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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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영국의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처럼 신라 선덕여왕은 로맨스 소문도 있었던 수수께끼의 여왕이긴 하지만 그보다 먼저 풀어야 할 역사의 숙제가 있습니다.』 고교수가 포도주를 마시며 구실장의 의견에 제동을 걸었다.
진한 회색 벨벳 재킷에 노란 베스트의 조화가 그를 열 살은 더 젊게 보여주고 있었다.푸릇푸릇 검은 신사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구실장은 그 댄디한 맵시 앞에 희미하게 드리워진그림자와 같았다.
『신라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 때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다가 왜(倭)로 가 왕과 귀비(貴妃)가 됐다는 연오랑(延烏郎) 세오녀(細烏女) 얘기는 잘 아실테지요.』 『삼국유사에서 봤습니다.』 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아달라왕 4년이라니까 서기로는 157년에 해당됩니다.그런데 삼국사기엔 그 16년 후 왜의 비미호(卑彌乎)가 아달라왕에게 사절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구실장은 묵묵히듣고만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쪽의 문헌인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의 마지막 대목 왜인조(矮人條)엔 3세기 무렵 왜섬의 모습이 비교적 소상히 그려져 있습니다.그 무렵의 왜엔 30여개의 작은 나라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가 장 큰 나라가여왕국이었다고 왜인조는 적고 있지요.이 나라의 왕은 원래 남자였는데,서로 맞서 몹시 싸운 끝에 여왕을 받들기로 합의하여 모셔진 것이 비미호라는 여인입니다….』 또 8세기에 나온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엔 일찍이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구슬.칼.
창.거울 등 일곱 가지 신기(神器)를 가져왔다고 돼있는가 하면,고사기(古事記)란 책에는 신라왕자 천일창은 아카루히메(あかるひめ)란 여인을 찾아 일 본에 간 것으로 돼있다며 고교수는 입담 좋게 설명을 펴나갔다.
『아카루히메의 어머니 얘기가 재미있어요.이 여인은 신라의 아구누마(あぐぬま)란 늪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생식기에 햇빛이 무지개처럼 비쳐들더니 곧 임신,빨간 구슬 「아카타마(あかたま)」를 낳았다는 겁니다.지나가던 남자가 이 구 슬을 받아 허리에 차고 다니다 신라 왕자에게 소도둑으로 몰리는 바람에 뇌물로 바쳤다나요.빨간 구슬은 신라왕자 앞에서 아름다운 여인으로변신하여 그의 아내가 되었지만,오만한 왕자가 지겨워 왜로 도망치자 왕자도 여인을 찾으러 왜로 건너 갔다 합니다.』 세오녀와,비미호여왕과,아카루히메는 혹시 동일인이 아닐까.또한 연오랑과,비미호하고 겨룬 남자 왕과,신라 왕자 천일창도 한 인물이 아닐까.이 수수께끼를 푸는 책을 펴내자는 것이 고교수의 주장이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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