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손녀와 善意의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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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에서 살다온 어린 손녀를 위해 염소와 개를 길렀다.손녀는먹이도 주고 장난도 치며 너무 좋아했다.잘한 일인 것같아 닭도추가로 키우기로 하고 계사와 사료를 준비한 후 폐계를 사러 장으로 나섰다.
걸쭉한 행상들의 입담,좋아서 깡충거리는 손녀,마구 짖어대는 개,꼬꼬댁거리고 푸드덕거리는 닭등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장터 분위기로 인해 내게도 생기가 돌았다.
폐계는 흙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손바닥만한 상자속에서 살며 수탉 한번 구경도 못하는 매우 불쌍하고 기구한 닭이다.「우리집으로 시집오면 좋은 환경에서 골고루 잘먹고 팔자가 피게 되리라」 생각하며 12마리분 대금을 지불하려는 순간 어 수선한 사이에 개가 그만 닭의 급소를 물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닭이 필사의 몸부림을 치며 죽는 소리를 내니 어린 손녀의 바로 코앞에서큰 난리가 돌발한 셈이다.
손녀는 금방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질렀다.나는 당황한 나머지 개를 걷어차 쫓아 버렸으나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내 불찰로 손녀에게 처절한 참상을 보여주고 말았다.
닭은 살아날 것같지 않아 우선 손녀를 현장으로부터 격리시켰다.손녀는 자그마한 회초리를 갖고 와 그렇게도 좋아했던 개인데도때려주라고 한다.주사기와 약을 보여 주며 『아니야,이걸로 치료해 다 나았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리고 기왕 죽은 닭이니 저녁거리로 손녀 몰래 닭죽을 만들었다.다리.목.날개같이 닭임을 알리는 확실한 부위는 숨겨버리고 그저 맛있는 고기죽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나또한 닭을 직접 다룬데다 손녀에게 거짓말을 해 닭죽 맛이 말이 아 니었다.
그리고 때묻지 않은 마음이 예기치 못한 닭의 죽음으로 상처받지 않았을까 영 개운치 않았다.세상사에 치여 어디 뜻대로 되랴마는 나는 아직 봄의 지순한 새순같은 그 아이의 마음에 한점 상처도 남기고 싶지 않다.천진난만한 순진덩어리 아 가야.건강하고 건전하게 자라만 다오.네가 어느정도 크면 내 거짓말이 불가피했다는 것과 동물세계의 약육강식을 설명해줄 수 있겠지.그리고「옛날에는 사람 사이에도 약육강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없다」고 참말을 자신있게 ■ 수 있었 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선택 충남서천군서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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