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1> 중국 무성영화의 톱스타 완링위(阮玲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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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聯華)’ 이사장이던 허퉁(何東), 홍콩 배우 린추추(林楚楚)와 함께한 완링위(가운데). 김명호 제공
1935년 3월 8일 부녀절 새벽, 중국 무성영화의 톱스타 완링위(阮玲玉)가 25년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신문마다 호외를 발행했다. 평소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미모에 경탄하던 상하이인들은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신보(申報)는 “나는 세상을 떠난다. 사람들은 내가 죄를 지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두려워해야 할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대는 말은 무섭고 두렵다. 단지 말이 두려울 뿐이다(人言可畏)”라는 유서를 공개했다. 마지막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사람들이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장례식 날에는 20여만 명이 거리를 메웠다. 조문객 겸 구경꾼들이었다.

완링위는 1910년 4월 상하이의 어둠침침한 골목 구석방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광둥인이었다. 아들이 아니라고 오만상을 찡그리던 부친은 갓난 딸을 보는 순간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완에게 미혹된 첫 번째 사람은 부친이었다. 5년 후 이 예쁜 딸을 더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어린 완링위를 데리고 남의 집에 입주해 허드렛일을 했다. 대저택의 한구석에서 주인집 식구들 눈치를 보며 사는 긴장된 생활이었다. 완은 엄마를 따라 온갖 잡일을 다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격이 변했다. 활달하고 영리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완링위 사후 “항상 조용하고 온종일 단정히 앉아 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며 천성이 그랬던 것처럼 회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 질식할 것 같은 환경 때문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다.

완의 모친은 학교 교육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남편의 말을 잊지 않았다. 딸을 명문인 숭덕여학교(崇德女學校)에 입학시켰다. 완링위가 16세 되는 해에 모친은 쫓겨났다. 주인집 셋째 아들 장다민(張達民)이 거처를 마련해 주며 완에게 접근했다. 완은 장과 동거에 들어갔다. 학업은 포기했다. 장다민의 큰형이 완을 영화사에 소개했다. 완링위는 데뷔 4년 만에 ‘영화 황후’에 뽑혔다.

장다민은 전형적인 삼류 건달이었다. 도박을 좋아했고 손버릇도 나빴다. 시도 때도 없이 돈을 요구했다. 완링위는 한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장의 악습은 고쳐지지 않았다. 완은 장과 결별했다. 매달 100원씩 보내줬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탕지산(唐季珊)이라는 차(茶)상인을 만나 가까워졌다. 탕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화교 출신 여배우와 헤어진 직후였고 춤 솜씨가 일품이었다. 완이 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장다민이 소송을 제기했다. 애당초 소송감이 아니었다. 완과 장은 결혼신고를 한 적이 없었고 장에게는 이미 결혼한 부인도 있었다. 목적은 돈이었다. 민사소송이라 법정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완링위에게 출두할 것을 통보했다. 황색 언론들은 연일 이 사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상하이는 욕망의 도시였다. 원한, 암살, 유언비어, 비정상적인 혼인과 정사(情死)등 각양각색의 욕망이 세속의 남녀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달라야 한다는 무서운 진리를 스스로 깨우친 사교성과 사기성을 겸비한 사람들의 천국이었다. 얼굴이 두꺼울수록 유리했다. 완링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수면제 세 통을 복용했다.

‘누가 완링위를 죽음으로 몰았을까’라는 제목의 글들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실명을 대놓고 거론했다. 당시 루쉰(魯迅)은 상하이에 있었다. 완링위 사망 1개월 후 ‘논(論) 인언가외(人言可畏)’라는 글을 발표했다. 언론의 음흉함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들을 법정에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법부의 고질적인 폐단, 남의 추문 듣기를 즐기며 귀에 익숙한 사람의 것일수록 더 즐기는 소시민의 아큐(阿Q)식 우월감이 완링위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단정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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