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黨바뀌어야한다>3.토론문화를 정착시키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신한국당에는 자타가 꼽는 대선후보감이 9명이나 된다.그러나 출마를 공식선언하거나 드러내놓고 자신의 정견을 발표한 인사는 드물다.당총재인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눈치만 살피며 언행을 조심한다.
특히 19일 金대통령이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고 호령한뒤론 그나마 간간이 나오던 돌출발언도 당분간 사그러들 전망이다.대통령후보로 나서려면 상당기간 시간을 두고 자신의 구체적 정견을 펼치면서 여론의 검증과정을 거치는 미국과는 천양지차다.
4.11총선 이후 서울대 교수출신인 국민회의 길승흠(吉昇欽.
전국구)의원은 『총선패인이 야권분열에 있다』는 주장을 펴다 곤욕을 치렀다.김대중(金大中)총재의 측근들이 『민주당에서 국민회의를 분리시킨게 총재인데 그럼 총재가 잘못했단 말 이냐』고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뒤 金총재는 15대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예상보다 저조했던 이유를 「금권과 관권,북풍(北風)의 3대악(惡)」때문이라고 정의했다.그리고 그게 국민회의의 공식입장이 됐다.
자민련도 별다를바 없다.김복동(金復東)수석부총재는 4.11총선이후 『국민회의와 연합해 양金씨가 아닌 제3의 후보를 내는 방안도 검토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그러자 당이 발칵 뒤집혔다.결국 金부총재가 『발언이 와전됐다』고 후퇴하 는 선에서 미봉(彌縫)됐다.
우리네 정당들은 그런 식이다.여야를 가릴것 없이 총재는 성역(聖域)이다.총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언행도 용납되지않는다.「일사불란」은 군대라면 몰라도 정당이 지향할바는 아닐 것이다.그런데도 『어딜 감히 총재에게…』하는 분 위기가 당연시된다. 우리네 정당들의 비민주적인 운영사례는 예를 들자면 끝이없다. 말썽 많았던 15대국회 개원협상때의 일이다.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들 사이에선 『이런 식의 등원거부를 언제까지 계속할거냐』는 불만도 많았다.그러나 비보도를 전제로 의견을 밝히던 의원들은 당의 공식자리에선 입도 뻥끗 못했다.
신한국당도 일부 의원들이 『국회의 수장인 국회의장을 대통령이일방적으로 지명해 뽑으라고 내려보내는게 과연 옳으냐』는 문제제기를 했다.그러나 아무도 그걸 공개화하진 못했다.이유는 간단하다.국민회의의 중진 K의원은 『여야를 가릴것 없 이 총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발언과 행동을 하는건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당규.당헌상에야 민주적인 토론이 보장돼 있지만 그런건다 휴지조각 규정일뿐』이라며 『당의 전체적 분위기를 거스를 만큼 용기있는 의원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총재가 공천권을 쥐고있는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물론 평당원들이 의견을 개진할 통로가 있긴 하다.각당 모두 의원총회와 당무회의.전당대회등 당론수렴을 위한 기구를 두고 있다.그러나 하나같이 당지도부가 제출한 내용을 형식적으로 의결하는 거수기의 기능을 넘지 못한다.
의원총회를 한번 살펴보자.『의총의 발언자는 당지도부가 대충 사전통고를 해줍니다.예정되지 않은 발언을 하면 돌출발언으로 눈총받고….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저 잠자코 있는게 상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신한국당 초선 L의원의 말이 다.
의총발언뿐 아니다.의원들의 본회의장 발언도 당지도부에 의해 「사전검열」된다.중복발언을 없애기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그 과정에서 지도부의 뜻에 어긋나는 발언은 거의 삭제된다.
지난달 열렸던 제180회 임시국회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국회의장이 『이의 없습니까.그럼 통과됐음을 선포합니다』하고 법률개정안을 통과시키는데 초선인 신한국당 K의원이 『난 그 법이 뭔지도 몰라요』라고 소리쳤다.웃음이 터졌지만 그건 아마 K의원의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거의 모든 의원들이 뭔지도 모르는 법을 통과시키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당지도부가 찍으라면 찍고,반대하라면 반대하는게 여야를 가릴것없는 우리 선량들의 투표행태다.
미국에선 극소수의 항목을 제외하곤 당에서 의원들에게 찬반여부를 지시하는것 자체가 연방헌법에 금지돼 있다.의원들의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크로스 보팅(당과 관련없이 의안에 따라 의원의 자율판단대로 투표하는것)을 보장한다.우리라 고 그런 제도를 도입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어느 누구도 앞장서지않는다. 국민회의 Y의원은 정당민주화를 가로막는 또다른 요인으로 가신(家臣)정치를 들었다.그는 『가신들이 의원들로선 생사가걸려있는 공천에까지 개입한다』고 비판했다.
신한국당 초선 C의원은 『도대체 총재는 고사하고 당 지도부에의견을 표시할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그는 『자꾸 좌절감을느낀다』고 했다.
국회의원은 헌법기관이다.헌법에 의해 신분이 보장된다.게다가 그들은 지역유권자의 투표로 당선된 사람들이다.자기분야에서 상당한 업적을 이룩한 경우도 많다.한데 우리네 정당구조는 이들을 꼭두각시 비슷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소속 홍사덕(洪思德.강남을)의원은 『각당 총재들이 지역주의를 근거로 공천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洪의원은 철저한 지역주의-공천권의 전횡-당내 비민주화-정당의 후진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며 한국정치를 꽁꽁 묶어두 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은 어느 하나를 없앰으로써 곧바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물론 우리정치의 가장 큰 과제중 하나인 정당민주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질리는 만무하다.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개선책을 찾아야만한다.그게 안되면 우리정치의 앞날은 암울하다.
국민회의 김원길(金元吉.강북갑)의원은 「당내 투표의 의무화」를 제시했다.총재와 지도부가 결정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하달하는게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은 당내 투표를 먼저 거치고 그게 당지도부에 올라가는 방법부터라도 먼저 시행해보자는 것이다.잘못된관행을 하나씩이라도 고쳐보자는 주장이다.
김종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