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땀이 깃든 공공디자인 ‘매뉴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이번 주에 받은 신간 중 『궁궐의 안내판이 바뀐 사연』(아름지기 지음, 안그라픽스, 280쪽, 2만5000원) 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4대궁과 종묘 안내판 개선사업’의 모든 것을 담은 ‘백서’였습니다. 지난 3년간 궁궐 안내판 바꾸는 일이 시작된 사연에서부터 여러 사람이 참여한 과정, 협의절차 등 일이 진행된 3년간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것입니다. 저자 이름으로 기록된 아름지기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모임(비영리단체)입니다.

아무리 궁궐 관련 사업이라지만 안내판 하나 바꾸는 일에 3년이 걸리고, 책 한 권 분량의 사연을 남겼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민관이 함께 참여해 이 프로젝트가 진행된 과정은 제법 만만치 않아보입니다.

디자인에 참여할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역사 공부였답니다. 궁궐의 역사와 가치를 되돌아보기 위해서죠. 그 다음엔 기존 안내판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일관된 디자인 체계를 만들고, 안내글의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궁궐의 품격에 어울리는 쉽고 짧은 영어 안내글을 쓰고, 안내판의 형태와 크기도 결정하고…. 이뿐만이 아닙니다. 안내판의 재료, 컬러, 내구성, 글씨체, 레이아웃 등 검토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 과정을 따라가 보면 여러 분야의 협업이 필요하고, 건축, 조경, 시각디자인, 역사학 등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공공미술’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됩니다.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은 책에서 “궁궐의 격을 살리면서도 시대 정신까지 담긴 안내판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작업에 참여한 안상수 교수(홍익대 시각디자인)는 공공디자인이 “우리 사회의 총체적·문화적 안목과 사회 시스템의 결과물”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문화환경을 조성하는 디자인은 미래의 문화재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책은 소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책입니다. 궁궐 안내판 하나를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다양한 “변수, 착오, 지체, 위기, 대립과 충돌 등 다양한 문제점까지” 시시콜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관련 분야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요즘 디자인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 책에서 안 교수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는 한 건축가(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디테일’을 중시하는 철학이 없었다면 궁궐 안내판에 시대정신을 담겠다는 야심만만한 도전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말에 4대궁(창덕궁,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에 나들이하신다면 안내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 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멋이란 것, 디테일에 대한 꼼꼼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인할 기회가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은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