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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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이를 낳고도 계속 학교에 다니게 해준 일이다.
큰아들 맥을 키울 때부터 그랬지만 여전히 젖의 양이 모자랐다. 남편은 수소문하여 유모(乳母)를 데려왔다.젖가슴과 엉덩이가팽팽해 아주 다부져 보이는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낳은지 10개월되는 딸을 가진 전쟁미망인으로,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을희네 집에서 숙식키로 했다.
살림을 맡아주는 늙수그레한 가정부에 유모까지….덕택에 공부를계속할 수 있었고 임시 수도의 피란 대학이나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얼 켄트교수의 당부대로 「끝내」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가슴이 벅차면서도 쓰리고 저렸다.
그의 소식을 들은 것은 만삭 때였다.남편으로부터 부탁받은 신생아 옷들이 도착했다며 여장교는 켄트교수의 근황을 함께 전해주었다. 그날,헬리콥터는 칡덩굴이 우거진 산중에 추락했다.덩어리뱀처럼 마구 얽힌 질긴 칡가지가 스프링 구실을 해준 덕에 헬리콥터는 산산조각이 되지 않았으나 갈라진 동체 사이에서 땅으로 떨어진 켄트교수의 하체를 잇따라 굴러내린 의자가 덮쳤 다.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그러나 하반신 마비라는 어처구니 없는 장애의몸이 된 것이다.
그는 현재 보스턴 근처의 바닷가에서 요양하고 있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에게도 주소를 알리지 않는다 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선해 전쟁의 가혹함을 새삼 뼈아프게 느꼈다.
졸업식날 아침 을희는 반짇고리에 숨겨 두었던 켄트교수의 반지를 꺼냈다.그가 대학 졸업때 모교로부터 받았다는 그 반지를 끼고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백금 고리에 박힌 작은 하늘빛 터키석이 얼 켄트의 눈물 같았다. 『…터키석은 행운의 상징이랍니다.』 바닷가 해당화 꽃무더기 앞에서 그는 쾌활하게 말했었다.
…행운의 반지.
을희에게 반지를 주고나서 켄트교수는 곧 사고를 당했다.「행운」을 벗어 준 탓이 아니겠는가.자기 혐오의 해일(海溢)로 몸을가누기가 어려웠다.
남편은 졸업식에 오지 않았고 계약 관계로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을희로서는 그가 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대신 생각지도 않던 이가 참석해 주었다.얘기꾼 침모의 아들인출판사 사장이었다.
결혼식날 단 하나의 을희측 집안대표로 참석해준 그가 졸업식날또 단 하나의 친지로 참석해준 것이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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