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규의 북디자인展을 보고-소설가이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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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정한 틀속에 자신을 가두고 열심을 다해 기왕에 있는 것을 공부하고,그 공부한 바를 제대로 풀어 먹으면서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그렇게 살기를 거절하고 「생각」의 자유를 외치는 떠돌이 앞소리꾼이샤 돼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드높이고 이 과정에서 만나는 사물에 시적 표정을 부여하는 사람이 있다.
독창적인 인간 정병규가 그런 사람이다.그는 있는 것을 누리는사람이 아니고 없는 것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그는 지극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책에다,출판행위에다 끊임없는 어떤 표정을 부여한다. 그 큰 디자이너의 작은 드러냄이 「정병규의 북디자인전」이다.이 전시회는 작다.「비 모어 심 레스」(Be More Seem Less.成而不現)철학의 소산인가.그러나 작아도,이 전시회는 국내 최초의 북디자인 전시회다.전시장에는 그가 구상한 디자인의 뼈대가,문자가 제거된 디자인의 스켈러튼(形骸)이 추상화처럼 내걸린다.그가 우리에게,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의 형해를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형해관조(形骸觀照)….벌써 존재론적이다.그의 「돌아보기」전시회는 우 리 삶을 돌아보도록 요구한다.
그는 책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그러니까 북디자이너다.그러나 나는 디자이너라는 말이 지니는 경망스러운 울림이 싫어 여기에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한다.나는 사상 최초의 디자이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이 세상 만들 것을 착상하고 계획 하고,초벌그림을 통해 설계하신 분이 그분이니 그분이야말로 위대한 디자이너가 아닐 것인가.그래서 나는 「섭리」라는 기독교 사투리 대신 종종 「하느님의 디자인」이라는 말을 써보곤 한다.도시 계획학 학자는 스스로를 「플래너」(계획자)라고 부르고는 하는데 나는 이 호칭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다.디자이너는 플래너다.전시회 인사말에서 그는 밝혔다.
『나는 디자인을 통해 책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나는 편집과 기획을 통해 디자인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간담이 서늘해진 사람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이다.
20년전 처음 만났을 당시,나는 신춘문예에 어중간하게 통과하고 나서 소설을 쓸 것이냐,번역에 매진할 것이냐를 두고 암산에열중하고 있었다.그런 나에게『소설 잘 쓰려면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며 그가 던져준 책 이 일본어판 칼 융의 저서 『인간과 상징』과 엘리아데의 한국어판 『우주의 역사』다.나는 두책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신화의 「바다」에 휘둘리게 되는데,이 신화와 고대종교라는 바다에서의 자맥질은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계 속되고 있다.그러므로 내가 그를 디자이너라고 부를 때의 디자이너는 여느 디자이너와 다른 울림을 갖는다.그는 내가 살아갈 20년 삶을 디자인해낸 셈이어서 그렇다.그는 그런 디자이너다.「생각」과 「바다」.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두개의 키워드다.
이윤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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