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紀行>"聖의 탄생" 발터 부케르트 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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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기원전 1세기 고대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쓴 『자연학 문제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클레오나이에서는 폭풍예고관이란 관리가 폭풍을 예고하면 주민들은 너나없이 양이나 닭을 제물로 내놓았다.그것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자기 몸의 일부를 제물로 바쳤다.』 20세기 인류학자인 영국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남긴 명작 『황금 가지』.이 책에는 집필 당시까지도 남태평양의 통가에서는 손가락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었다는기록이 담겨 있다.이런 의식은 남태평양 지역만이 아 니었다.아메리카.아프리카.인도.오세아니아등 거의 전 지역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이라크의 아파치야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제단에서 손가락 모양의 돌 5점과 손가락뼈 1점이 출토됐다.심지어수십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의 장례에서도 종교의식이 행해졌음을 엿보게 하는 흔적이 있다고 한다.
문화와 시대는 달라도 종교의식만은 거의 예외없이 행해졌고 그행태도 아주 비슷하다.그 배경은 무엇일까.
독일의 고전학자로 고대종교 전문가인 발터 부케르트가 최근 미국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펴낸 『성(聖)의 탄생』(The Creation of the Sacred)은 바로 이런 인류학적 연구결과물을 토대로 종교의 기원을 더듬고 있는 문 화인류학서다.
이 책은 근동.이스라엘.그리스.로마 등의 고대종교는 물론이고 수천년이 지난 현대종교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독자들을 지적모험의 세계로 안내한다.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종교상의 상징.희생.의식의 세계가 재미있게 그려진다.
이 책은 아울러 동물 행태와 인간의 종교적 활동을 비교해 희생.죄의식.처벌 등의 개념 변화도 설명한다.또 동서고금에 걸쳐제기됐던 종교철학들도 검토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현대인이 아무리 문명세계에서 산다 하더라도 종교적인 측면에서만은 인류 최초의 「종교적인 인간」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종교의식이 매우 유사한 점에 대해 저자는 생물 학적 접근을꾀하면서 「자연종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의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런 이성이나 통찰에서 종교가 비롯됐다는 뜻이다.다시 말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게 종교적 감각과 관행을 이어받도록 돼 있다는 설명이다.
종교적 성향이 유전인자를 통해 대물림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종교의식이나 가르침에 어떤 생물학적인 패턴이 잡힌다는 그의접근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종교 기원을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생태학적 반응에서 찾는다.인류 역사 초기에 자연의 무한한 힘 앞에서 인간은 더 큰재앙을 막기 위해 제물을 내놓았고 그런 의식은 연약한 인간에게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시하는 기능을 맡았다는 설명이다.
부케르트는 종교를 「눈에 보이지 않는 초능력자와 의사를 소통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인류역사 초기부터 시작된 전통」이라고 해석한다.이런 전통은 언어와 글을 통한 가르침이나 집단의식을 통해 후대로 끊임없이 내려온다.
부케르트는 자신의 생태학적 접근을 강화하기 위해 동물세계의 행태까지 끌어들이는 대담성을 보인다.
인간이 손가락을 자르는 희생행위와 비슷한 행태는 동물세계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덫에 걸린 여우가 한쪽 발을 자르고 도망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또 어떤 거미 종류는 다리 구조가 쉽게 부러지도록 돼 있다.이런 구조는 힘센 곤충에게 잡혔을 경우 「약탈자」가 잘린 한쪽 다리에 혼을 팔고 있는 사이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여유를 준다.도마뱀의 꼬리 역시 쉽게 끊어지는데 그것도 같은 목적이라고 한다.저자는 생존을 위해 일부분을 희생하는 이런 행위를 「전체를 위한 부분 희생의 원칙」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바로 이런 예를 통해 부케르트는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행위의경우 동물의 생태학적 프로그램에 입력된 것이 아닐까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 문화중에서 종교활동만큼 생명이 긴 분야도 없다.
인류역사상 종교탄압이 끊이지 않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수많은 변혁이 돌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여전히 건재하다.하지만 종교 형태만은 크게 달라졌다.
말이 정보를 저장하고 전파하는데 결정적 발전을 초래했다면 그다음 결정적 전기는 5천년 전 글자의 발명이었다.글자의 발명에힘입어 말의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준의 「객관성」이 인간 두뇌에 각인되게 됐다.저자는 유대교. 기독교.이슬람교가 교세를 떨치게 된 것도 이 글자의 발견과 관계가 깊다고 풀이한다. 부케르트의 주장대로 종교가 언어를 통한 가르침과 집단적 의식행위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면 인터네트로 대표되는 정보화사회에서는 종교에 어떤 운명이 닥칠지 궁금하다.
발터 부케르트(65)는 스위스 취리히대의 고전문학 교수.70년대에는 미국의 UC버클리대에서도 강의를 맡았다.독일 뮌헨대를졸업한 뒤 에를랑겐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그의 저서에는 근동지역의 문화가 그리스 문화에 끼친 영향을 파헤친 『 그리스 종교』를 비롯해『고대의 신비한 제식』『동양화(東洋化)혁명』등이 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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