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BC ‘더 좋은 물건 많다’ 외환은행 인수 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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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HSBC은행의 외환은행 인수가 끝내 불발됐다.

HSBC는 “세계 시장에서의 자산가치 변화를 감안해 론스타와 맺기로 한 외환은행 인수 계약을 철회한다”고 19일 발표했다.

샌드 플록하트 HSBC 아태지역 최고경영자(CEO)는 “외환은행 인수를 지속하는 게 주주들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아 계약을 철회키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금융위기로 세계적인 금융사들이 급매물로 나오는 상황에서 굳이 외환은행을 비싸게 사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HSBC는 지난해 9월 한국 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론스타의 외환은행 지분 51%를 60억1800만 달러(약 6조원)에 사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계약 후 외환은행의 주가가 하락하자 HSBC는 지난 7월 말부터 론스타와 인수 가격을 낮추기 위한 협상을 해왔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외환은행의 주가 하락과 함께 금융위기로 세계적인 회사들이 헐값에 나오기 시작하자 HSBC가 인수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론스타와 HSBC 간의 인수가격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HSBC 관계자는 “정부가 승인 심사를 너무 늦추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HSBC는 지난해 12월 금융위의 전신인 금융감독위원회에 승인 심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금융위는 론스타와 관련한 재판(외환은행 헐값 매각, 외환카드 주가 조작)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미루다 8월 중순에야 심사를 시작했다.

김광수 금융위 금융서비스국장은 “심사 도중 계약을 파기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론스타와 외환은행도 성명을 내고 “매우 실망스러운 조치”라고 밝혔다.

외환은행 어떻게 되나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작업이 1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몇몇 국내 은행이 관심을 보이곤 있지만 국내외 금융시장 상황이 급작스레 나빠져 단기간에 새로 매각 작업을 추진하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금융위원회의 책임론도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인수 희망자인 HSBC에 대한 승인 절차를 론스타 관련 재판과 연결시킴으로써 HSBC가 인수를 포기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에서다.

◆표류하는 외환은행=HSBC는 금융위의 승인 심사가 지연되자 영국 정부를 동원해 압력을 가할 정도로 외환은행 인수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금융위가 승인 심사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게 HSBC와 론스타의 계약 만료 시한을 일주일 앞둔 7월 25일이었다. 가까스로 매각 시한은 이달 말까지로 연장됐지만 8월 이후엔 HSBC든 론스타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게 돼 있다.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계약이었던 셈이다.

그러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져나오면서 HSBC는 외환은행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HSBC는 미국의 모건스탠리나 워싱턴뮤추얼의 인수 후보자로 거론되기 시작하더니 끝내 외환은행에서 손을 턴 것이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금융위가 언제 심사를 끝낼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6조원이나 되는 거액을 외환은행만 바라보고 묶어 두는 것에 대해 HSBC 내 반발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책임 전가=금융위는 계약 파기의 책임을 모두 HSBC에 떠넘기고 있다. 곧 심사 작업을 끝내려 하는 참에 HSBC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정통한 한 인사는 “계약이 파기된 데 대한 책임을 묻자면 정부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론스타가 직접 관련된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 2심에서 론스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또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은 론스타와는 관계도 없는데도 금융위는 이 재판의 결과를 승인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금융위 스스로 헐값 매각 재판의 1심 판결 시한에 얽매여 심사 절차를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1998년 독일 코메르츠은행에 처음 지분을 매각한 이후 10년간 외환은행은 제자리걸음만 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인수경쟁 벌어지나=론스타는 외환은행 지분을 쪼개 시장에 팔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론스타로선 경영권 프리미엄을 받을 수 없어 당초 예상한 만큼의 차액을 남기긴 힘들다. 게다가 외환은행 주가는 현재 1만1000원대로 크게 떨어진 상태다. 따라서 다른 인수 후보와 재매각 협상을 벌이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점쳐진다. 리처드 웨커 외환은행장도 이날 “새로운 대주주를 찾기 위한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 팔든 새로운 인수 후보와 협상을 벌이든 외환은행은 국내 은행에 넘어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현재로선 외환은행을 인수할 여력이나 관심이 있는 외국계 금융회사는 많지 않다. 1차 후보는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이다. 두 은행의 행장은 HSBC의 발표 이후 기자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국민은행은 2006년 인수 문턱까지 갔다 좌절한 경험이 있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도 합병을 통한 성장전략에 적극적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국제 자금시장의 경색으로 대규모 외화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 국내 은행들도 실탄 마련에 부담이 적지 않다.

김준현·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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