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행복을 나르는 도시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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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소풍간다고 들떠서인지 아이들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도록 즐거운 소풍으로 이어지는 꿈나라 여행을 했으리라. 이른 새벽부터 아내는 아이들 도시락 준비로 달그락 지글거리고 집안을 감도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아침 잠을 깨운다.

학교 갈 시간은 아직도 먼 곤히 잠든 아이들 머리맡에 각각 3000원씩과 함께 잘 다녀오라는 쪽지를 남겨두고 출근길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작은 쇼핑백을 들려준다. 이것저것 준비하기도 바빴을 텐데 내 점심 도시락을 쌌단다. 그래서 잠 많은 아내가 새벽부터 서둘렀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고맙다는 변변한 인사도 없이 싱긋 웃어만 주고 출근길에 올랐다. 밀리는 자동차 속에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학창 시절 도시락에 대한 추억을….

대를 이어온 찌그러진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에 담긴 밥은 쌀보다 보리가 더 많이 들어간 잡곡밥이었다. 반찬도 이때쯤이면 김장김치도 떨어져 무를 소금에 절였다가 고춧가루 넣어 벌겋게 버무린 짭짤한 장아찌가 전부였다.

그때 도시락 한가운데 보름달처럼 덮여 있는 계란프라이가 든 도시락을 가져가 당당하게 친구들 앞에서 열어보이는 것이 큰 소망이었다. 한 반에 몇 명 안 되는 그런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기억에 혼자 쑥스러워 웃었다.

그리고 아내가 준비해준 도시락은 언제였나. 아마도 신혼 초 예비군훈련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그것도 십오년 전 일이다.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밀리는 출근길도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점심시간. 다른 날처럼 오늘은 어디서 뭘 먹나 고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제외~"를 자신있게 외치며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한결같이 부러운 시선들이다. 미안하고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으쓱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살랑살랑 속눈썹을 간질이는 봄바람이 불어오고 철쭉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핀 사무실 근처 공원 벤치에서 도시락을 펼쳤다. 늘 깔끔한 아내답게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김밥 두 줄과 노란 유부초밥 세개, 방울토마토 여섯개, 그리고 보리차 한병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정성에 취하고 봄 꽃향기에 취해 나만의 멋진 오찬을 맘껏 즐겼다. 내내 부러워하는 직원들에게 기쁜 맘으로 자판기 커피 한잔씩 돌렸다.

퇴근해 집에 오니 아이들이 반갑게 내 목에 감기며 선물이라고 작은 꾸러미를 내민다. 천연염색장에 다녀왔다며 감물을 곱게 들인 손수건을 사온 것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 소주 한잔을 준비한, 고맙고 알뜰한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 덕에 행복함은 저녁까지도 이어졌다. "그래 사는 게 별 거냐.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하며 또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이명식 (46세.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푸르지오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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