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변기가 럭셔리 쇼룸에 간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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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서울 삼성동 봉은사 네거리에서 잠실운동장 방면으로 가다 보면 갤러리처럼 널찍한 쇼룸에 세면대나 변기가 무슨 작품처럼 전시돼 있는 매장이 나온다. 지상 2층 두 개 층에 걸쳐 총 670여㎡에 이르는 이 공간의 이름은 욕실용품을 모아놨다는 뜻에서 ‘바스하우스(Bath House)다 . 미국 아메리칸스탠다드의 라이선스 수입업체가 5월 일반 소비자를 겨냥해 차린 매장이다.

국내 위생도기 3위 업체인 아이에스동서(옛 동서산업)도 서울 청담동 프라마호텔 인근에 다음달 초 개장을 목표로 갤러리형 쇼룸을 만들고 있다. 이 회사는 올 초 제각각 이름이 있던 위생도기와 타일을 ‘이누스’라는 브랜드로 통합했다.

위생도기는 주택건설업체가 주요 고객인 전형적인 ‘기업 간 거래(B2B)’ 품목이다. 그런데 위생도기 업체들이 서울 강남의 비싼 공간을 임대해 호화로운 쇼룸을 차리고 일반 소비자에게 손짓하는 건 왜일까.

서울 삼성동 아메리칸스탠다드의 ‘바스하우스’에 전시된 욕실 용품들(上). 이 회사가 매달 여는 인테리어 강좌는 주부들에게 ‘욕실도 인테리어’라는 의식을 고취한다(下). [김태성 기자]


◆변기가 강남으로 간 까닭은=박소영 아메리칸스탠다드 마케팅 과장은 “변기는 이제 소비자들이 직접 선택하는 CIY(Choose It Yourself) 제품”이라고 말한다. 이 회사가 쇼룸을 연 뒤 방문한 월평균 2000여 명의 고객 가운데 60%가 기업이 아닌 일반고객이었다. 소비자가 물건을 고르면 자택의 욕실에 시공까지 해준다. 6월부터는 주부 상대의 인테리어 강좌를 매달 열어 ‘욕실도 인테리어’라는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위생도기 시장의 이런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는 꽤 낯선 풍경이다. 국내 시장은 연 3000억원대로 대림비앤코(옛 대림요업)·계림요업·아이에스동서가 전체의 80% 정도를 과점한 조용한 시장이었다. 그러다 올 들어 뭔가 튀려는 변화가 감지됐다. 대림요업과 동서산업이 회사명에 영문 표현을 넣고 브랜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회사별 특화 품목을 중심으로 사이좋게 시장을 나눠가졌는데 요즘엔 물밑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업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움직임은 아파트 건설경기가 부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장의 80% 정도를 점한 주택건설업종의 발주 물량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1990년대까지도 수위를 지키다 대림에 밀린 계림이 근래 1위 탈환을 외치며 아파트건설 시장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원래 대림은 아파트건설 시장, 계림은 대리점 사업이 장기였는데 이젠 그 경계가 무너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3위권 이하 업체나 수입업체들은 양대 업체의 경쟁에 밀려 설 자리가 점점 좁아졌다. 이들이 고안한 전략이 바로 CIY다.

B2C는 결국 B2B에도 도움을 준다. 아이에스동서의 권지혜 상무는 “아파트 욕조 물량은 향후 상당 기간 가장 큰 시장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위를 점하려면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의 눈에 들고 입 소문을 타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 강남에 막대한 돈을 들여 전시장을 마련한 건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키우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근래 새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들의 의사를 반영해 욕실용품을 설치하는 일이 보편화하고 있다.

◆욕실용품의 재발견=공동주택의 위생도기가 소비자가 직접 고르는 제품이 된 데는 비데의 공이 컸다. 비데가 장착되면서 변기는 용변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좌욕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건강용품이 된 것이다. 근래 위생도기 업체들이 기능성 변기 개발에 매달리는 연유다. 비데 일체형 변기, 살균·소독에 건강 증진 기능까지 갖춘 원적외선 변기 등이 그것이다.

최근엔 배설물을 분석해 당뇨나 건강을 체크하는 기능성 변기도 상용화를 기다리고 있다. 유럽에서 디자인한 변기·세면기·샤워부스·욕조 등이 국내에 출시되면서 소비자들의 디자인 안목도 높아졌다. ‘주택시장의 침체’와 ‘변기의 진화’가 어우러져 상당 기간 잠잠했던 위생도기 업계가 꿈틀거리고 있다.

양선희 기자 ,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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