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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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아버지와 정길례여사는 스티븐슨교수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모녀의 만남을 위한 것이지만 신혼여행이나 다름없는 그 나들이에 따라나설 만큼 염치없진 않았다.
『할아버지 유품집이 나오게 됐으니 지키고 있어야겠어요.내치신걸음으로 유럽에도 들러오시면 좋겠네요.북구(北歐)는 이제부터 아름다운 백야(白夜)거든요.』 우변호사와 함께 지낸 덴마크의 백야 생각으로 가슴이 저며지듯했다.언제쯤이나 돼야 이 연옥(煉獄)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지 정녕 아득하기만 하다.
『도쿄 가시거든 애소를 꼭 좀 만나주셔요.』 공항에서 당부했다. 『이자벨이 잘 돌봐주고 있긴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북돋워주셔요.착실한 아이예요.』 정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라벤더 빛깔의 단정한 슈트로 차려 입은 그녀는 피어넘치듯 아름다웠다.사랑받으면 여인은 이렇게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인가.가슴이 또 메었다. 『안녕히 계십시오.다시 만납시다.』 콕 로빈이 서투른 우리말로 천천히 말하고 나서 아리영의 손등에다 키스했다.그리고 영어로 덧붙였다.
『로빈 후드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것입니다.』 아리영은 고개를 저으며 연약하게 웃었다.
『로빈 후드는 제겐 너무나 과분한 기사(騎士)예요.』 스티븐슨교수와 이자벨이 탑승 수속을 마치고 나서 다가와 아리영을 번갈아 껴안았다.
『덕분에 좋은 공부가 됐어요.』 스티븐슨교수는 정여사와의 만남을 큰 수확으로 여기고 있었고,이자벨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에 대한 취재 결과에 흡족해 하고 있었다.
뭔가 끈끈한 관계를 지닌 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일본으로떠난다. 고대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끈끈한 관계를지니고 일본으로 잇따라 건너갔을까.
왜로 간 남편 연오랑(延烏郎)을 따라나섰다는 세오녀(細烏女)가 그랬고,백제 무령왕(武寧王)을 임신한 채 남편의 임지로 간그의 어머니가 그랬다.
백제 성왕(聖王)의 아들 무왕(武王)이 정말 7세기초의 왜왕서명(舒明)이라면 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서명의 왕비 황극(皇極)여왕은 혹시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는 아닌지.고구려.백제.신라.가야…4대세력이 겨루는 격동기의 고 대일본서 그녀는 두번이나 왕위에 올랐다.두번째 이름은 제명(齊明).신라와 백제 양쪽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중조(重祚)가 아닐까.선화공주도 로맨스의 여주인공이다.
혼자 돌아온 집 마당엔 자귀나무가 연붉은 꽃봉오리를 가득히 머금고 있었다.합환화(合歡花)는 머지않아 흐드러지게 피어오를 것이다.나무줄기를 손으로 쓸며 아리영은 중얼거렸다.
『어머니,이젠 아버지를 놓아주셔요.』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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