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기③ 진정한 남북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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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01.8.15∼21일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측대표단 3명의 북한 방문기를 소개한다.)

「아직도 남쪽사람에겐 어렵고 힘든 일로 인식되는 방북의 행운이 내게 찾아온 것은 분명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개인목적이 아니라 시민단체의 각계 대표가 모여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을 돌파하고 민간교류의 폭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성사된 방북길인지라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한 것이었다.

지난 6박7일간의 북한여행이 비록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분명 의미있고 값진 시간이었다. 우선 이번 방북은 내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남쪽 북한연구의 근본적 한계가 연구대상지역에 대한 접근불가능성임을 감안할 때 북한연구자를 자처하는 내게 연구대상을 직접 보고 접해볼 수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흔치않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평양행 비행기를 탄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도 사실은 바로 이같은 개인적 이유에서였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평양 한복판에서 북쪽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북을 직접 보고 느끼며 책으로만 접했던 곳을 실제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간접적 북한연구를 직접적 북한연구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남쪽의 오징어가 낙지로, 자두가 추리로 불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북한사람들이 인민대학습당에서 컴퓨터프로그램을 통해 도서검색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부족하긴 하지만 이젠 누구에게도 북한에 대해 자신있게 말하고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차적인 필요조건은 갖춘 셈이다.

또한 이번 방북은 남북간의 민간교류 확대라는 차원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부문별 단체별 민간교류가 간헐적으로 진행되긴 했지
만 이번처럼 종교, 학술, 경제,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등 영역과 계층을 아우르는 다양한 민간부문이 한꺼번에 그것도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북쪽과 교류의 폭을 넒힐 수 있었던 것은 민간대화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실제로 방북단은 평양체류기간 기독교인 남북합동예배, 천주교인 남북합동미사, 불교인 남북합동법회 등을 통해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닌 일반 신도차원에서 최초의 남북공동의 종교의식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또 청년학생, 여성, 노동자, 농민, 예술인, 경제인 등이 북쪽과 직접 대화하고 향후 민간교류발전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6.15 공동선언에 명시된 다방면적인 교류협력이 당국간 대화뿐 아니라 제반의 시민사회 영역이 직접 나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한 것이었다. 방문기간 평양시내와 교외를 지나면서 북측의 어려운 상황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번 방북에서 얻을 수 있었던 중요한 성과였다.

짧은 기간의 주마간산식 여정이었지만 북쪽의 실제상황은 예상했던 수준 이상으로 훨씬 심각했다. 최고급 호텔중 하나인 고려호텔에서도 북쪽의 경제난을 실감할수 있었고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비춰진 평양시민의 옷차림과 도시풍경에서도 경제상황의 심각성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칠흑같은 어둠이 이어지고 시내 한복판의 대형아파트에서도 조명은 침침한 백열등이 전부였다. 70년대에서 정지 해버린 듯한 회색 콘크리트 건물과 묘향산으로 가는 길에 보인 열손가락으로 헤아리고도 남는 자동차를 보면서는 그 누구도 북쪽을 도와야 한다는데 이견을 가질수 없었다.

최악의 경제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그안에 순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이들의 곤경을 기회로 삼아 체제를 붕괴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질수 없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마저도 쓸데없는 대북 퍼주기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는 한 지금 시기 시급히 북한을 방문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냉전적 대결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임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하는 방북이었다.

어렵게 성사된 방북길이라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민간대화의 질적 발전을 위한 진통일 수밖에 없다. 수백 명이 방북 한다는 사실만으로 언론이 요란법석을 떠는 지금의 상황은 여전히 지금의 남북관계가 시작에 머무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더이상 방북이라는 사건이 요란한 기사거리가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남북화해의 길은 열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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