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시장은 원래 소란한 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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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끄러운 곳이 시장이다. 조용하면 오히려 이상하다. 땡처리 옷가게 골목시장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증권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외치는 상인의 소리는 장사꾼 속셈이니 거짓 과장도 있다. 고객들이 가려 들으면 된다.

지난 한 주일 금융시장의 소란은 좀 지나쳤다. 추석연휴 이전에 마치 세상이 파탄 날 듯 떠들썩했다. 한국인 마음에 깊은 외상(外傷)을 남긴 ‘외환위기’와 미국의 ‘9·11’을 합성한 루머 때문이었다.

소문 제작자들은 시장상황 몇 가닥을 모아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엮었다. 우선 만기도래 채권이 9월 9일부터 11일 사이 7조9000억원이 몰려있는 데 착안했다. 외국인 채권보유액이 약 67억 달러어치나 되다 보니 모두 털고 나가면 원화가치가 폭락해 외환위기가 촉발된다고 했다. 외환보유액(2432억 달러, 8월 말 기준)에 비하면 작은 돈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달 국제수지가 적자인지라 위기설이 솔깃했다. 9월 11일 10억 달러 외국환평형채권 발행계획이 성공하면 루머는 꼬리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근래 단기외채 증가는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 상당 부분은 외국계 은행 몫이고 조선 등 수출업체의 환헤지용이므로 수주자금이 입금됨에 따라 자동 해소된다. 외환사정의 수시 점검을 게을리 말아야 하지만 외환부족이 당장 발등의 불이 아니라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이나 S&P·무디스·피치 등 신용평가기관도 뒷받침하고 있다.

 루머는 금융위기도 끌어들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환란 때와 달리 기업부문 재무구조는 건실한 편이다. 물론 부동산 경기침체로 건설업체가 심각한 유동성 압박을 받고 있고, 내수위축으로 중소기업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같은 고통은 세계적인 공통현상이지 유독 한국만의 현실이 아니다. 다행히 국제유가가 하락해 국제수지 개선을 기대할 수 있어 잠시 숨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위기설이 하나의 설로 그치겠지만 위기는 언젠가 반드시 찾아온다. 과거와 현재의 위기 또는 ‘설’을 제대로 읽어내면 위기예방 또는 최소화에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환란 이후에도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 공기업 개혁, 정부의 위기관리체계 정립, 정치 혁신, 국민정서 계몽은 세계화 흐름에서 여전히 낙후돼 있어 위기의 불씨로 남아있다. 가연성 물질을 하나하나 제거해야 한다. 이웃나라처럼 환란의 원인을 밝히는 백서(白書)를 발간하기보다 가공의 책임자를 만들어 단죄하기에 치중하는 우리의 관행이 중요 정책 이슈마다 되풀이되어 관료들이 선제적 대응정신을 잃고 몸을 사리게 만들었다.

 일이 생기면 ‘미루고, 덮고, 섞고’ 자리 지킬 꾀를 부리게 되었다. 요즘 경찰의 공무집행 시 면책권 부여 문제가 관심을 끌고 있지만 정작 면책이 부여돼야 할 곳은 경제정책·감독 당국이다. 미국 연방은행은 법제상 상업은행 감독이 본령이지 투자은행은 아니다. 우리 같으면 감옥 갈 일을 하고도 버냉키 총재는 칭찬받는다. 위기 시에 정책당국의 재량이 인정되어야 한다. 부정부패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감독당국은 시장거래자를 상대로, 감사원과 사직당국은 관료를 상대로 경기규칙의 재량을 인정해야 한다. 당국의 선제적 대응능력은 보이지 않고 정부기구 간의 손발 맞추기가 어설퍼 보인다.

이번 위기설의 제조자들이 외환딜러 또는 증권·애널리스트들이라고 지목하고 당국이 이들을 엄중 단속하겠노라 엄포를 놓고 있다. 부당이익 챙기기를 제외하고는 조치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시장경제를 하려면 그것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당국의 눈에 못된 장난질로 보여도 헤지나 공매도처럼 허용된 시장게임이면 괘씸죄로 걸어선 안 된다. 시장에는 항시 입소문이 무성하다. 그런 시장을 단속 못해 안달하면 실패한다. 정보 홍수 속에 당국이 자칫 악수를 둘 수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 생각하자. 당국이 악성 루머를 방치해도, 과잉 대응해도 웃음거리가 된다. 특히 국제금융시장을 지향한다는 정부가 말이다.

김병주 서강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