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랠리와 한국의 ‘官災’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호 32면

바닥을 모르고 줄곧 떨어지던 미국 달러화 가치가 지난 몇 달 사이 계속 치솟고 있다. 달러화는 4월 22일 유로당 1.6달러까지 떨어졌다. 이 바닥을 찍고 극적인 반등 행진, 즉 랠리(rally)를 지속 중이다.

미국 경제가 좋아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은 여전히 취약하고 두 국책 ‘모기지 거인’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부실은 언제 터질지 모를 금융폭탄이다. 그럼에도 유가가 내리고, 특히 유럽연합(EU)과 일본·영국 등 여타 나라 경제가 좋지 않아 상대적으로 강세로 돌아선 것이다. 글로벌 경제에 나쁜 뉴스는 달러화에 좋은 뉴스란 얘기인가.

펀더멘털과 동떨어진 달러 랠리라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가을철 ‘반짝 더위’ 또는 ‘병상에서 떨치고 일어났지만 회복에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비유도 따른다. 유가가 다시 오르고 미국인의 소비가 위축되면 다시 약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달러 강세의 지속 여부는 이처럼 불투명하지만, 적어도 달러화의 장기적 하락 행진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 골드먼삭스의 판단이다.

최근의 달러 랠리 배경에는 네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얽히고 설켜 있다. 글로벌 큰손들이 달러화 기피에서 달러화 선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 첫째다. 헤지펀드 등 큰손들은 달러 가치 하락에 대한 헤징 수단으로 원자재와 원유 등 상품 투자에 열을 올렸다. 아직 ‘선호’라고 얘기하기는 일러도 달러가 배척 내지 기피되던 시대는 지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EU와 일본 등 여타 국가들이 2분기 마이너스 성장으로 경기후퇴에 접어드는 시기에 미국 경제는 거의 바닥을 쳐 달러화와 미국의 주식·채권 등에 대한 투자 전망이 상대적으로 밝아지고 있다는 점이 둘째 변화다. 달러화의 오랜 약세로 미국의 수출과 산업생산이 호조를 보여 온 반면 EU는 강한 유로화 때문에 달러뿐 아니라 달러에 가치가 고정된 중국·홍콩 등 아시아 통화들에 대해서도 고전해 왔다. 미국 바깥 세계의 경제가 나빠진다는 경제기류 변화에 외환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글로벌 신용경색과 금융기관들의 상호 불신으로 글로벌 총유동성 공급량이 증가를 멈추었다는 점이 셋째 변화다. 금융 부실 여파로 글로벌 규모의 금융자산 디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다. 달러화가 그만큼 귀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바깥 외국의 중앙은행들이 자국 통화를 팔고 달러 사들이기를 시작했다는 점이 넷째 변화다. 경제가 후퇴 국면으로 접어들자 미국에 대한 수출을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국 통화를 절하시키는 환율 조작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달러 랠리의 지속 여부는 미국과 EU의 금리정책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유럽 및 영국 중앙은행은 금리 인상을 유보하고 경기 진작을 위해 금리 인하를 고려 중이다. 반면 미국은 7월 인플레가 5.6%로 17년래 최고에 달해 연방준비은행이 금리 인상 쪽으로 기울고 있다. 유럽이 내리고 미국이 올려 금리 차가 확대되면 달러 강세에 속도가 붙게 된다. 여기에 중국·인도 등 신흥 성장 국가들의 성장세가 주춤할 경우 더욱 탄력을 받는다. 아시아 중앙은행들은 한동안 외환보유액을 소진해 가며 자국 통화가치 유지에 개입해 왔지만, 달러 강세로 그들이 보유한 막대한 달러 자산가치가 올라가자 달러 강세를 내심 묵인하는 이중성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대응이다.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가 단기간에 너무 가파르게 떨어졌다. 외국인의 주식 매도는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쏠림 현상과 불안심리가 겹치면서 금융 패닉을 자초했다. 정부의 환율 관리가 시장에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율 상승을 유도하다 태도를 180도 바꿔 하락을 유도하고, 다시 환율 상승을 용인하는 듯한 근시안적 환율정책은 합리적 예측을 어렵게 해 시장과 경제에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한 달 전 미국의 저명한 국제경제 전문가 윌리엄 클라인과 존 윌리엄슨은 달러화가 아시아 통화들에 대해 여전히 과대평가돼 있다면서 원-달러의 균형 환율을 달러당 850원으로 시산한 바 있다. 긴 안목 없이 수출 촉진이나 물가 관리 등 그때그때의 정책필요에 따라 환율정책이 냉·온탕을 오간다면 이야말로 정부가 만든 재앙, 곧 관재(官災)가 아니고 무엇이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