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센터 경계경보로 시작, 특유의 쏠림이 과잉반응 낳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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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08면

위기설은 지난해 11월 외국인이 주식을 팔고 채권을 대량 매수한 것이 불씨가 됐다. 당시 외국인은 국내 채권 95억7560만 달러어치를 사들였다. 사상 최대 규모였다. 반면 국내 주식은 84억7530만 달러어치를 팔아치웠다. 역대 둘째로 많은 매도 금액이었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 외국인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28일 통계자료를 발표하며 “외국인이 채권을 사들인 것은 재정거래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위기설 전개와 파장

지난해 외국인의 채권 대량 매수가 불씨
외환위기 재발 방지를 위해 1999년 설립된 국제금융센터는 외국인 움직임을 주시했다. 국제금융센터의 올 1월 4일자 공개 보고서는 중동지역과 중국의 국부(國富)펀드가 장기채를 매집하고 있고, 외국인이 매입한 채권의 만기가 특정 시기에 집중돼 있다고 분석했다. 또 투자자금의 급격한 이탈이 발생할 경우 국내 채권시장에는 상당한 교란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융백 연구원은 “지난해 7~8월까지만 해도 외국인 보유 채권 잔액이 2조원이 안 됐으나 한·미 금리 차이가 커지자 이득을 보려는 외국인의 채권 매수가 전례 없이 급증했다”며 “당시 증권사 채권애널리스트들도 원인을 분석하고 영향을 검토했다”고 말했다.

위기설은 4월 들어 ‘3분기 대란설’로, 5월 들어서는 ‘9월 위기설’로 시기가 구체화했다. 9월 위기설은 5월 16일 한 정보서비스 회사가 외국인 보유 채권의 만기가 9월에 몰렸다는 소식을 전할 정도로 채권 시장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급기야 금융감독원은 채권 만기 현황을 공개하고 “외국인 일부가 이탈할 가능성이 있으나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며 위기설 진압을 시도했다.

잠시 수그러든 위기설은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6월 11일 “외환위기 때 상황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몇 가지 조짐이 보인다”고 밝히자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외환보유액 감소, 무역수지 악화 등의 지표도 위기설이 실체를 갖췄다는 인상을 줬다.

규모·개방·쏠림의 3박자 취약
위기설이 한국 시장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시장의 특성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개방과 시장 규모를 꼽는다.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은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에 비해 더 개방돼 운신의 폭이 크다. 파생상품 시장 등 여러 수단도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중국만 해도 외국인은 일정 한도 내에서 투자할 수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외환규제가 많다. 반면 한국은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외국자본이 드나들기 좋은 환경을 갖춘 나라로 손꼽힌다. 게다가 한국시장은 규모가 선진국처럼 크지 않아 특정 세력이 마음만 먹으면 시장을 조작할 수 있다. 쏠림현상이 극심해 시장이 비관과 낙관의 어느 한쪽으로 급속도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주가가 오르면 한없이 치솟을 것처럼 행동하고 떨어지면 끝없이 추락할 것처럼 조바심을 낸다. 그래서 한국시장은 화끈하다고 한다. ‘다이내믹 코리아’다. 변동성이 크면 돈 벌 기회도 많다.

시장에 균형자 역할을 해줄 선도 기관이나 권위 있는 리더가 많지 않아 시장의 쏠림이 방치되는 면이 있다. 또 산업 측면에서 조선업 등 몇몇 수출산업의 위력이 지나치게 크다. 수출 대기업이 달러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외환시장의 춤판이 달라진다. 한국만의 현상이다. 정명수 코리아본드웹 시장분석팀장은 “수출의존도가 높아 세계 경기가 좋아지면 달러가 넘치지만 내수는 그만큼 성장하지 않는다”며 “수출·내수의 불균형은 쏠림을 낳고 결국 시장의 변동성을 높인다”고 말했다.

정치권이 시장을 함부로 다루는 것도 취약 요인이다. 여권은 6월까지만 해도 촛불집회에 대응해 ‘국난적 상황’이라며 위기임을 스스로 강조했다. 여권은 지금 와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경제 위기설을 퍼뜨린 세력이 있다며 화살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다.

정치가 시장을 쥐고 흔드는 한국적 상황은 정책담당자의 선택폭을 좁힌다. 시기를 놓쳐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기도 한다. 정책담당자가 정치적 구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까지 생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루머 단속을 하고 싶었으나 ‘공안정국식 대응’이라는 비난을 살까봐 제때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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