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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나라당의 두 가지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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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회학 전공자로 우리 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 중 하나는 이념구도의 흐름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 이념지형은 보수 대(對) 중도 대(對) 진보가 대체적으로 3 대 4 대 3의 구도를 보여 왔다. 국면에 따라 보수와 진보의 부침이 다소 있었지만, 지난 몇 년간 이 구도는 어느 정도 안정돼 왔다.

흥미로운 것은 전체 이념구도와 개별 이슈에 관한 이념구도의 차이다. 얼마 전 방송된 한국방송공사(KBS) 제1라디오 ‘열린 토론’의 8·15 특집 국민의식조사는 주목할 만한 결과를 보여줬다. 전체 이념구도에서는 보수 대 중도 대 진보의 비중이 30.2%, 42.1%, 26.2%가 나온 반면, 개별 이슈들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팽팽히 맞서고 중도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 해소 등 소득분배보다 경제성장에 비중을 두는 게 우선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그렇다’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가 44.0%, 20.8%, 32.8%로 나왔으며,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정치나 사회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다’라는 질문에는 40.7%, 22.0%, 36.7%로 조사됐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공권력 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이런 경향은 그대로 관찰됐다. ‘집회와 시위로 사회질서가 위협받을 때 경찰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질문의 답변 비율은 각각 35.7%, 15.0%, 48.8%였으며, ‘북한은 대한민국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로 우리의 주적이다’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36.1%, 21.0%, 42.0%를 기록했다.

이런 조사가 시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념구도의 이중성이다. 총론에선 중도의 비중이 높은 안정적인 구도를 드러내지만, 각론에선 보수 대 진보의 비중이 높은, 매우 예각적인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당신의 이념성향은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고 다소 애매한 중도를 선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지만, 개별 정책 이슈들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분명한 이념적 성향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단봉(單峯)이 아니라 쌍봉(雙峯) 낙타 구도가 우리 이념구도의 현주소이며, 상대적으로 높은 중도의 비중은 일종의 착시현상일지도 모른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 우리 사회에서 이념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점차 약화돼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념은 직·간접적으로 정책대안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앞선 조사가 함의하는 바는 쌍봉형 이념구도 아래서 사회통합 및 국민통합을 이뤄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의 정책 추진이나 국회의 입법 과정은 자연히 이념적 성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보수와 진보가 팽팽히 맞서는 여론 공간에서는 결국 격렬한 논쟁을 야기한다. 바로 이런 현실이 우리 정치의 딜레마를 이루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월요일 정기국회가 개원했다. 벌써부터 전운이 감돈다. 한나라당은 이참에 좌편향적인 법들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한 반면, 야당들은 결사항전의 태도를 취한다. 입법 과정과 정책 추진은 집권 여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고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야당들과의 대화를 통한, 그리고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사이의 쌍방향적 토론정치를 통한 반복적인 피드백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먼저, 우리 사회 이념구도가 갖는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감세·민영화·출총제와 금산 분리, 사학법 및 방송법 개정 등은 주요 제도들의 방향을 결정할 쟁점들이다. 이 점에서 최근 정몽준 최고의원이 강조한, 한나라당은 경우에 따라 진보적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는 ‘중도화론’은, 그의 정치노선에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되새겨봐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강경 보수로의 회귀가 아니라 중도를 두텁게 하는 방향에 한나라당의 첫 번째 미래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재의 정치구도는 2004년 총선 직후와 매우 유사하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됐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타협에 있으며, 입법권력의 일차적인 역할은 행정권력과의 견제와 균형에 있다. 열린우리당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에 한나라당의 두 번째 미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