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풍속화의 독보적 존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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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그림 속 젊은이처럼 신윤복(申潤福·1758?~1813 이후), 그는 훤칠한 키에 미끈한 얼굴의 미남으로 분 냄새 짙은 기방(妓房) 출입이 잦았는지 모른다.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한 정형화된 인물은 대체로 이를 그린 화가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호는 다소 여성적인 뉘앙스를 지닌 혜원(蕙園·난이 흐드러진 동산)인데 비해 자(字)는 사뭇 터프한 이미지를 풍기는 입보(笠父·갓 쓴 남자)다.

유명세와 달리 태어난 해나 죽은 해 모두 알려져 있지 않고 공적인 활동상도 가려져 있어 신비감을 준다. 도화서 내 활동기록이 전무하며 춘화(春畵) 때문에 도화서에서 퇴출당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부친이 화원이었기에 조선왕조 사회에서 같은 직장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근무할 수 없는 제도[相避]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신윤복 작 ‘월하정인(月下情人·부분·그림 위)’과 ‘야금모행(夜禁冒行)’.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미끈한 얼굴의 젊은 사내는 혹시 풍류를 즐겼던 신윤복 자신을 투영한 걸까.

신윤복 작 ‘월하정인(月下情人·부분·그림 위)’과 ‘야금모행(夜禁冒行)’.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미끈한 얼굴의 젊은 사내는 혹시 풍류를 즐겼던 신윤복 자신을 투영한 걸까.

혜원은 여항문인(閭巷文人)들과 어울린 식자층으로 화면 한 모퉁이 묵서를 통해 유려한 서체를 뽐내는 한편으로 ‘미인도’의 “능히 잘 드러내 그렸다”나, ‘전모를 쓴 여인’에 “옛 사람들이 못한 일을 했다”는 등 화가 자신이 쓴 제사(題辭)를 빌려 그림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남다른 자부심을 시사했다. 이를 통해 그가 문장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원의 부친 신한평(申漢枰·1735~1809 이후)은 영조와 정조 두 임금 초상 제작에 세 차례 참여했고 75세까지 오랜 기간 도화서 활동이 확인된다. 전화위복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상황이 혜원의 작품 활동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혜원은 기녀들이 주인공이고 남정네가 조연인 국보 제135호『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 6점 모두 기녀만을 그린 『여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혜원의 11대 선조가 신말주(申末舟·1429~1503)이며 그의 부인은 조선 최고의 여류화가며 문장가인 설씨부인(薛氏夫人·1429~1508)이다. 예맥의 오랜 전통을 지닌 가문이나 5대조가 서자였기에 그 이후 중인으로 떨어져 4대에 걸쳐 화업 및 역관에 종사하게 된다. 부친은 어진 제작 때 주로 수종화사로 채색을 담당했으니 혜원의 남달리 곱고 화사한 채색은 부친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단원 김홍도보다 10세 연상인 부친에 견주어 보면 혜원이 태어난 해는 일러야 1750년대 말이며, 현존한 작품의 간기는 1805년부터 13년까지 8년간으로 주로 19세기 초에 활동했다. 본명이 신가권(申可權)으로 밝혀졌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윤복은 예명일 가능성이 크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우리들에게 사뭇 친숙한 화가들이다. 이들의 풍속화는 ‘우리 문화의 황금기’인 조선후기 진경시대 사회상을 문헌기록보다 진솔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 둘은 풍속만이 아닌 문인화풍의 산수와 삶의 체취가 감지되는 인물, 사실적이며 서정성 짙은 동물화, 유려한 글씨 등 다방면에 능했다.

화풍과 소재의 공통점 외에 두 사람은 다른 점도 있다. 단원은 정조 임금을 비롯해 여러 문집에 언급이 있고, 사대부와 농부 장인과 상인 등 사회 각 계층을 애정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에 옮긴 풍속화를 남겼다. 혜원은 남녀노소의 춘정(春情)을 비롯해 기방과 우물가를 배경으로 한 여흥과 놀이, 사찰 주변 등 19세기 초 서울 왕조 말기의 난만상을 섬세하고 고른 필선에 화려한 색채로 화폭에 담았다.

혜원은 기록이 몹시 드물며 전해진 작품 수가 백 점도 못 되나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과 춘의풍속화에 있어 남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독보적 존재다. 남녀 애정에 초점을 두어 춘색(春色)이 짙되 적당한 선에서 노골적이지 않은 절제된 묘사로 그 속내는 보는 이의 상상에 맡긴다.

특히 익살과 풍자로 풀어내 감칠맛 나는 미감으로 전혀 외설스럽지 않는 예술로의 승화가 돋보인다. 이 두 거장의 유작은 조선 전통사회가 옥죈 숨막힌 공간 아닌, 정과 익살이 깃든 흥취가 있는 따듯하며 살맛 나는 곳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원복 국립전주박물관장, 자료협조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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