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아버지 유해, 모국에 편히 모셔 기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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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아버님의 생전 소원은 돌아가신 뒤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뒤늦게나마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해준 한국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제시대 때 쿠바에 살면서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귀국한 고(故) 임천택(林千澤.에르네스토 임)선생의 4녀 이르마 임 킴(62)여사. 그는 26일 "아버님은 생전에 한 순간도 모국(母國)을 잊은 적이 없었다"면서 "이역만리의 독립운동을 인정해준 한국 정부에 다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임천택 (1903~1985)선생은 쿠바에서 민족교육 운동을 펼치며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했던 대표적인 쿠바의 독립운동 지도자다. 국권이 흔들렸던 구한국인 1905년 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로 갔던 林선생은 21년 3월 쿠바 생활을 시작했다.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에서 '노예 이민'과 다름없는 농장 생활을 견디다 못해 배를 타고 쿠바로 건너가 새 삶을 선택했다. 그와 함께 한인 동료 30여명도 건너갔다. 그러나 쿠바 마탄사스 등지에서의 사탕수수 농장 생활은 여전히 빈곤과 생활고의 연속이었다. 林여사는 "당시 하루 끼니를 잇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고 부모님에게서 들었다"고 말했다.

林선생은 가난 속에서도 한인 노동자를 규합했다. 25년 그는 마탄사스 농장에서 '민성국어학교'를 만들어 한국어 교육을 시작했다. 나라 잃은 민족이 국어마저 잃으면 영원히 독립하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38년엔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를 창설해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그해부터 8.15 광복 때까지 林선생은 광복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246달러를 송금하기도 했다.

林여사는 "아버지는 1930년대 초 부터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다"며 "34년부터는 상해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 받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줬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97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임천택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번에 다른 해외 독립운동 선열 유해 4위와 함께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선생의 유해를 안장토록 했다.

林여사는 "아버님은 한인 동포들에게 '너희들의 모국인 한국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며 "한국과 쿠바가 하루빨리 외교관계를 맺어 한국의 발전상을 쿠바에 있는 한인 후손들이 실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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