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화려한 말보다 정책 …‘블랙 케네디’에 8만 청중 열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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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39세의 젊은 변호사 버락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당시 일리노이주 대의원으로도 뽑히지 못한 그는 LA공항에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승용차를 빌리려 렌터카 부스로 갔으나 직원은 “크레디트 카드 빚이 연체된 걸로 나오기 때문에 차를 줄 수 없다”고 했다. 오바마는 통사정을 한 끝에 차를 빌려 대회장에 갔다.

그러나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일리노이주 당원모임에 참석해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이 일리노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말을 했다는 AP통신의 짧은 보도가 당시 흔적의 전부다. 더빈 의원은 “그때 오바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최근 뉴욕 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런 오바마가 8년 만에 민주당 전당대회의 주인공이 됐다. 대회 마지막 날인 28일 그는 더빈 의원의 소개를 받고 무대에 나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더빈은 “오바마는 새로운 세기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다는 걸 고취시켰다”며 “오바마는 우리를 살기 좋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28일(현지시간) 덴버 인베스코필드 풋볼경기장에서 8만여 명의 지지자 앞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덴버 AFP=연합뉴스]

덴버 시각으로 밤 8시 오바마가 등장하자 8만4000여 명의 청중은 “오바마”를 연호하며 성조기와 ‘단결’ 피켓을 열광적으로 흔들었다. 오바마는 후보 지명을 수락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힐러리를 “내 두 딸과 여러분의 딸들에게 영감을 줬고, 노동자들의 챔피언이 됐다”고 치켜세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2004년 보스턴 전당대회에서 자신을 스타로 만든 기조연설의 대목을 꺼냈다. “4년 전 여러분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케냐의 젊은 남자(아버지)와 캔자스 출신의 젊은 여성(어머니)은 유복하거나 유명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미국에서 아들이 꿈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다음 세대도 그들의 꿈을 추구할 수 있다는 걸 보장해야 한다”며 “이번 대선이 그 기회”라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이날 웅변조의 연설을 하지 않았다. 44분 동안 추상적이고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기보다는 구체적인 정책 비전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을 이끌 준비가 돼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대기업과 석유재벌에 엄청난 세금혜택을 주면서도 1억 명에 달하는 납세자에게 단 한푼의 세금혜택도 주지 않는 정책은 안 된다. 나는 노동자 가정의 95%에 감세혜택을 주겠다” “팁으로 생활하는 여자 종업원이 하루라도 휴가를 내서 아픈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경제적 여유를 찾아주는 일이야말로 미국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는 등의 연설이 대표적인 예다.

오바마는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는 “매케인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책 중 90%를 찬성했다”며 매케인의 집권을 ‘부시 3기’로 정의했다. 오바마는 베트남전 전쟁영웅인 매케인의 강점이 안보 분야임을 의식한 듯 “안보 문제를 놓고 매케인과 토론하는 걸 환영한다”며 “우린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의 정당이다. 민주당이 나라를 보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흑인 케네디’라는 별명이 붙은 오바마의 연설을 듣기 위해 대의원과 당원, 시민 등은 오전부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후 3시쯤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에게 “도대체 줄이 얼마나 긴 거냐”고 묻자 “6마일(9.6km)쯤 된다. 입장하려면 3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매케인은 이날 “미국을 위해 정말로 좋은 날”이라며 “오바마에게 축하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그러나 공화당은 백악관을 연상케 하는 오바마의 연설 무대에 그리스 신전과 같은 대형 기둥이 설치된 것을 보고‘오바마의 신전(temple)’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런 무대를 만들어 놓고 노동자 감세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느냐”고 비난했다.

덴버=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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