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일리노이주 당원모임에 참석해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이 일리노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말을 했다는 AP통신의 짧은 보도가 당시 흔적의 전부다. 더빈 의원은 “그때 오바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최근 뉴욕 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런 오바마가 8년 만에 민주당 전당대회의 주인공이 됐다. 대회 마지막 날인 28일 그는 더빈 의원의 소개를 받고 무대에 나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더빈은 “오바마는 새로운 세기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다는 걸 고취시켰다”며 “오바마는 우리를 살기 좋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28일(현지시간) 덴버 인베스코필드 풋볼경기장에서 8만여 명의 지지자 앞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덴버 AFP=연합뉴스]
오바마는 이날 웅변조의 연설을 하지 않았다. 44분 동안 추상적이고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기보다는 구체적인 정책 비전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을 이끌 준비가 돼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대기업과 석유재벌에 엄청난 세금혜택을 주면서도 1억 명에 달하는 납세자에게 단 한푼의 세금혜택도 주지 않는 정책은 안 된다. 나는 노동자 가정의 95%에 감세혜택을 주겠다” “팁으로 생활하는 여자 종업원이 하루라도 휴가를 내서 아픈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경제적 여유를 찾아주는 일이야말로 미국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는 등의 연설이 대표적인 예다.
오바마는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는 “매케인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책 중 90%를 찬성했다”며 매케인의 집권을 ‘부시 3기’로 정의했다. 오바마는 베트남전 전쟁영웅인 매케인의 강점이 안보 분야임을 의식한 듯 “안보 문제를 놓고 매케인과 토론하는 걸 환영한다”며 “우린 프랭클린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의 정당이다. 민주당이 나라를 보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흑인 케네디’라는 별명이 붙은 오바마의 연설을 듣기 위해 대의원과 당원, 시민 등은 오전부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후 3시쯤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에게 “도대체 줄이 얼마나 긴 거냐”고 묻자 “6마일(9.6km)쯤 된다. 입장하려면 3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매케인은 이날 “미국을 위해 정말로 좋은 날”이라며 “오바마에게 축하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그러나 공화당은 백악관을 연상케 하는 오바마의 연설 무대에 그리스 신전과 같은 대형 기둥이 설치된 것을 보고‘오바마의 신전(temple)’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런 무대를 만들어 놓고 노동자 감세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느냐”고 비난했다.
덴버=이상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