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46>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돌계단으로 웬 중년 스님 하나가 바랑을 짊어지고 머리에 밀짚모 쓴 차림새로 슬슬 내려왔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도 주춤거리며 일어나 가방을 집어들었다.

- 광덕 스님 아시는 분인가?

그의 말에 나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했다.

- 따라오슈. 참 무슨 생각으루 당신을 내게 붙여 주었는가 모르겠네.

그의 법명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도 녹록지 않은 선승이었음이 틀림없다.

- 댁에를 보낼 데가 없다구 나더러 데려가라는데 우리 절은 코딱지만한 암자요. 형편이 어려워서 오래 데리고 있을 수는 없어요.

시외버스에 흔들리며 울산 방향으로 몇 시간을 달려가서, 또 다시 바닷가를 따라가는 오솔길을 수십 리나 걸어가 당도한 곳은 그야말로 서너 칸짜리 법당 건물 한 채에 거처할 방까지 딸린 오막살이 암자였다. 그래도 들여다보니 불상은 한 분 모셔 놓았고 법당 옆에 부엌과 방이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몇 년이나 묵었는지 모를 거친 멍석이 깔려 있었다. 바위 절벽이 지척인데 암벽을 때리는 세찬 파도 소리에 처음에는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나를 데려간 스님은 절을 오래 비워 두었으니 대청소를 해야 한다며 나에게 법당 걸레질부터 시켰다. 초등학교 시절 청소하던 기억대로 걸레를 마루에 대고 엎드려 오락가락하면서 먼지를 닦아 냈다. 스님은 계속 아궁이에 불을 때라, 밥을 해라, 시키더니 바랑에서 알루미늄 '벤또'를 끄집어냈다. 아마도 범어사 주방에서나 얻어 왔을 성싶은 고구마순 나물, 김치, 절인 무짠지 등속이 벤또 안에 가득 들었다. 한밤중에 촛불 켜고 밥 한 그릇씩 퍼 놓고 꿀맛 같은 저녁밥을 먹었다.

단칸방인 줄 알았더니 부처님 모셔 놓은 법당 마루를 지나자 왼편에 길쭉하고 비좁은 변소 같은 토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바닥에 그냥 흙을 바른 방인데 오래되어 꺼풀이 일어난 멍석 한 장이 깔렸다. 파도 소리에 잠을 못 이루고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 이런 밥버러지 같은 놈을 보았나. 부처님께 귀의하겠다는 놈이 예불 시간도 모르고 처질러 자느냐!

이런 놈은 맞아야 한다며 스님은 누워 있던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났고 손을 휘저어 연신 막으면서 법당을 지나 마당 아래로 도망을 쳤다.

- 허, 저놈 봐라. 당장 나가거라!

하더니 그는 방안에 있던 내 옷가지와 가방을 사정없이 마당으로 내던졌다. 나는 허둥지둥 신발을 신고 가방을 집어들고 그래도 막상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스님은 알은 체 않고 곧 이어서 법당에 앉아 목탁을 때리며 예불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서 있다가 나는 길을 더듬어 바닷가 오솔길을 되짚어 나오기 시작했다. 비틀대며 걷는 사이에 먼동이 텄다. 저절로 눈물이 솟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개놈으 새끼, 땡초 같은 중놈이….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