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시설 불능화 중단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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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북한 외무성은 26일 미국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했으며 핵시설의 원상 복구도 고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외무성 성명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방한해 한·중 정상이 북핵 진전 노력을 합의한 다음날 발표됐다.

또 지난 22일 뉴욕의 북미 접촉에서 미국이 제의한 북핵 검증 계획안을 공개 거부한 성격도 있어 향후 북핵 폐기 과정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북한 외무성은 이날 대변인 성명에서 “미국이 6자회담의 10·3 합의 이행을 거부해 조선 반도의 핵 문제 해결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됐다”며 “우리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부득불 대응 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밝혔다. 성명은 “10·3 합의에 따라 진행 중이던 핵시설 무력화(불능화) 작업을 즉시 중단키로 했다”며 “이 조치는 지난 14일 효력이 발생돼 이미 유관 측에 통지됐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중단했다는 조치는 사용 후 연료봉의 인출을 중단한 것으로 8000여 개의 사용 후 연료봉 중 하루 30개 안팎씩 인출했던 것을 지난 14일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이를 중국을 통해 미국 등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명은 또 “우리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영변 핵시설들을 곧 원상복구하는 조치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북한 군부 등의 요구에 따라 후속 조치가 이뤄질 수 있음을 예고했다. 성명은 특히 “미국은 갑자기 핵신고서에 대한 검증에 국제적 기준을 적용, 우리나라의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뒤져보고 시료를 채취하고 측정하는 것과 같은 사찰을 받아들일 것을 강박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이 말하는 국제적 기준은 1990년대 국제원자력기구가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려다가 결과적으로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초래했던 특별사찰”이라며 “미국이 우리에 대해서도 이라크에서처럼 제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큰 오산”이라고 비난했다.

성명은 “미국이 우리만 사찰하겠다는 것은 우리만 무장해제시키려는 강도적 요구”라며 “우리는 ‘미국에 고분거리지 않는 나라’ 명단에 그냥 남아 있어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문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 6자가 비핵화 2단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할 시점에서 불거진 유감스러운 조치”라며 “조속히 불능화 조치를 재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고위 당국자도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켜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차원에서 자극적으로 나온 것으로 추측한다”며 “우리는 과잉 대응하지 않고 6자회담 5개국 간 긴밀한 협의를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노 페리노 미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이 핵을 포기했다는 걸 입증하려면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며 “북한이 약속을 지켜야 미국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북한이 여전히 (핵 불능화) 의무가 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핵 불능화=북핵 폐기의 2단계 조치. 2006년의 6자회담 2·13 합의에서 북한이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만드는 데 사용해 온 영변의 5㎿ 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하고 폐쇄·봉인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어 10·3 합의에서 2단계 조치로 주요 핵심 부품을 제거하고 원자로에 장착된 8000개의 연료봉을 꺼내 원자로 재가동을 못 하게 하는 불능화 조치(disablement)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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