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행정 누수부터 막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요즘 「정치」라는 말만 들어도 신물난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신문은 정치에 왜 그리 많은 지면을 할애하느냐고 나무라기도 한다.이러다가는 정치가 전자파 이상가는 공해로 꼽힐는지도 모르겠다.
선거가 끝나자 이어 연쇄회담이 열리는 것을 보고 순진한 국민들은 모처럼 기대를 걸었다.집권기간안에 더는 선거도 없고 임기도 말기에 접어들게 됐으니 이제 타협의 정치,마무리 정치가 이뤄지려나 했다.
이번 총선결과가 절묘한 황금분할이라는등의 호들갑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연쇄회담을 보고는 그런 분석이 크게 빗나간건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웬걸,역시 순진한 생각이었다.청와대 칼국수가 채 소화도 되기 전에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바꿔놓으려는 작전은 시작됐고 그 때문에 단번에 정국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처음부터 기대도,관심도 갖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영수회담이란 쇼 때문에 괜히 솔깃했다가 결국은 또 속고 만 것이 못내 분하기만 한 것이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정말 정나미 떨어지는 저 마키아벨리스트들의 정치놀음을 이제부터라도 싹 외면해버리고 이 빛나는계절에 어디 야유회 갈 궁리나 하면 좋으련만 나쁜 정치는 필연적으로 나쁜 행정에,나쁜 경제를 빚어내 우리의 삶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칠테니 그럴수도 없는 일이다.
정치는 상충하는 이해를 적절히 조절하며 사회통합을 이루는 구심점을 제공한다고 교과서에 쓰여 있다.그러나 독재 대 반독재의투쟁이 벌어지는 시대가 아닌데도 정치행태만은 여전히 옛 그대로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이니 이해조정이나 사회통 합은 커녕 오히려 분열과 대결을 조장하지 않을까 적이 두렵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 그런 의심이 들게 하는 조짐들이 나타나고있다.또 정치의 무능으로 인한 행정의 태만과 무사안일 현상도 드러나고 있다.국책사업 특별법제정까지 검토하기에 이른 중앙정부와 지자체간의 갈등이 그 보기다.
이런 갈등은 이미 오래전에 예상돼 왔던 것이나 이제까지 아무런 대비도 하지않고 있다가 옛날 방식으로 밀어붙이려고만 하니까반발을 사게 된 것이다.우리나라에는 정치9단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그 정치9단이라는 것이 그저 선거 치러 권력얻고,정치인들 주무르는 기술에 불과하다면 9단아니라 10단인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정치9단의 실력이 행정9단으로 육화(肉化)돼 나타날 때 비로소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최근 서울 시민을 놀라게 한 연쇄납치강도사건에 대한 경찰의 처리도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택시를 타고 가던 여자가 대낮에 운전사와 승객을 가장한 범인들에게 납치당해 돈과 신용카드를 빼앗겼다.
피해자는 즉시 이를 신고했고 경찰은 차량번호는 물론 은행 폐쇄회로TV에 찍힌 범인의 모습까지 확보했으나 1주일,열흘뒤 두차례나 더 범행을 저지르도록 다른 경찰서에 사건발생 사실을 통보도 하지 않았다.그저 일이 귀찮기만 해서 대낮 택시강도와 같은 엄청난 일을 신고해도 축소하고 덮기에 급급하는 정신상태-.
이런 것이 비단 경찰에만 국한된 것일까.
최근 민원인들은 공직사회의 부정이 수법만 예전과 다소 다를뿐다시 살아났고 늑장처리에 무사안일까지 겹쳐 짜증과 분통이 난다고 불평하고 있다.이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권위주의적 행태에 젖을대로 젖어온 행정이 탈(脫)권위 주의적 환경을맞으면 무력감.무사안일.보신주의.이기주의와 같은 역기능만 도드라지기 쉽다는 것도 일찍이 예상돼 왔던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행정이 탈권위의 자율성과 의욕을 갖추려면 새로운 가치관과 목표를 제시해줘야 한다.그러나 행정에 목표나 구심점을 제공하는 능력은 권위주의시대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다는 지적들이다.
그러다보니 큰 일이든,작은 일이든 청와대나 총리실이 직접 나서야지 부처단위로는 도무지 영(令)이 서지 않고 있다.각종 위원회니 기획단이니 하는 것들은 주로 그런 연유로 생긴 것이다.
통치력 누수를 막고 남은 임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려면 국회의석 과반수 확보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는지모른다. 그러나 당장 시급하고 걱정해야 할 것은 행정기관안의 누수현상이다.그것은 이미 태만과 갈등으로 표면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