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中年>6.패션디자이너 김영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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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금 당신의 나이는 만 서른여섯.직업은 전업주부.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옷 입기에 남다른 감각이 있지만 사회 경험은 화랑 등을 경영하는 남편을 옆에서 도운 것이 전부.
그런 당신이 우연한 기회에 옷 만들기를 시작하고, 8년만에 한국인 디자이너로는 드물게 폐쇄적이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밀라노 컬렉션에 진출,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패션 디자이너 김영주(金鈴珠.45.「파라오」대표)씨는 『그렇다』고 대답한다.바로 자기 자신의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시작한 의류업체를 이끌던 유명 디자이너가 1년반만에독립을 선언하고 나가버렸어요.회사가 막 기반을 닦아나가던 때여서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지요.』 궁지에 몰린 남편이 『한번 직접 해보겠느냐』고 묻자 덥석 그러겠다고 대답했다.대학(서울대미대)시절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아 동대문 원단시장을 드나들며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던 기억만 철석같이 믿으면서.
그때가 87년 초.유복한 가정부인으로 지내며 국내 패션업계가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던 터라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한 핸디캡 속에서도 철저히 지켜나간 원칙이있었다.다름아닌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는 것.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럽고,최후의 한 땀까지 공을 들인 「완성도가 높은 옷」이 그의 목표였다.
『조금 지나니까 처음부터 디자이너 입장이 아닌 고급 소비자의위치에 있었던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느껴지더군요.다른 집 옷과는 뭔가 다른 것같다는 평이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요.』 지아니베르사체,조지오 알마니 등 유명 수입브랜드만 찾던 장안의 멋쟁이들이 하나둘 고객으로 몰려 들었다.그 짬짬이 그는 뉴욕(FIT)과 밀라노(말랑고니 패션스쿨)에서 단기 연수코스를 마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88년에는 일본 다이마루백화점 초청으로 고베(神戶).교토(京都)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고,92년에는 영화 『사의 찬미』에서 의상을 맡아 대종상 의상상을 수상하는 등 영역을 하나둘 넓혀갔다. 『국내 시장에 자신이 생기니까 세계무대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특히 밀라노는 실험적이고 튀는 옷 중심의파리와는 달리 곧바로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이 많아 저하고흐름이 잘 맞았지요.』 3년간의 노력끝에 지난해 3월 동양인 디자이너로는 유일하게 이탈리아 패션협회 정규회원 자격을 얻어 밀라노 컬렉션에 작품을 발표했다.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욕심을 낸다는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를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며칠밤을 새우는 고된 일이지만 그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없다고 말하는 金씨.『절실한 동기만 있다면 언제 시작하느냐가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며 항상 꿈을 꾸고 있으라는 조언을 덧붙인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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