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라면은 되고 쌀은 안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요즘 강영훈(姜英勳)대한적십자사총재는 심사가 편치 않을 게다.민간 차원의 대북(對北)쌀지원을 놓고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전국교수협의회등 6개 시민단체들이 쌀과 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지난 1월말.신문.방송등 각종 매스컴을 통해 비친 북한 주민들의 딱한 모습이 계기가 됐다.처음부터 쌀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당초 취지가 북 한 식량난을돕자는 것이어서 자연스레 쌀이 모였다.특히 성남시 1만여 주민들이 한되씩 낸 쌀이 1백2가마나 됐다고 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이같은 선의(善意)는 지난 8일 허사가 됐다.적십자사가 공문을 보내 『쌀과 현금은 불허한다는 통일원 방침에 따라 보내줄 수 없다』는 불가(不可)방침을 통고한 것이다.
통일원측의 설명은 이렇다.『정부는 지난해 9월14 일 민간차원의 대북 쌀지원에 대한 불가 방침을 밝혔다.쌀을 보낼 경우 군량미 전용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단 라면같은 가공식품은 허용한다.』 통일원의 이런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교묘한 방법을 동원,실리를 챙기면서 동포의 호의를 농락하는 짓거리가 이쁠 수는 없다.
그러나 통일원의 행보가 「눈가리고 아웅」식이라고 반박하면서 선뜻 동감하지 않는 시민단체등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이들의 지적인즉 이렇다.
첫째,정부가 대북 지원정책에 원칙이 없다.정부는 되고 민간은안된다는 것도 이상하다는 얘기다.또 지난해 쌀지원과 관련,국민들로부터 혼쭐이 난뒤 정부지원도 중단됐지만 그러나 엄밀히 말해당시 국민들이 문제삼은 것은 「쌀지원」 자체가 아니라 쌀지원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갈팡질팡하는 변변치 못한 정책수행이다.
그래놓고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마저 차단,국제사회의 빈축을 사고있다. 둘째,정책의 모호성이다.적십자사는 지난 1월 군용으로 전용될 소지가 「있는」 라면 10만개를 북한에 전달한 바 있다.그러나 같은 식량임에도 불구하고 「라면은 되고 쌀은 안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셋째,기존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정부가 대북 식량지원을 막는다고 해도 민간단체들이 마음만 먹으면 외국기관을 통해 북한에 쌀과 돈을 보낼 수 있다.
권오기(權五琦)통일부총리는 지난해 12월 취임사에서 북한당국과 주민을 동시에 고려하는 대북 정책의 복안화(複眼化)를 강조했다.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지금 權부총리는 복안을 버리고 당국만 응시하는 「단안(單眼)」을 택한 것일까.답답 한 것은 비단 북한문제만이 아니다.
최원기 정치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