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스포츠가 아름다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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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올림픽 열기가 뜨거웠던 한 주였습니다. ‘마린보이’ 박태환의 금메달과 역도 69kg급 이배영의 부상 투혼, 또 여자 양궁 박성현의 은메달…. 메달 색깔에 상관없이 선수들의 땀방울은 하나같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는 재미 덕에 일상의 스트레스도 한결 가벼워진 듯합니다.

당연히, 책 읽을 분위기는 아닙니다. TV에, DMB에, 인터넷에. 올림픽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유비쿼터스’ 환경이니까요. 불황과 촛불집회에 치여 여느 해보다 잔인한 상반기를 보낸 출판계는 6월말 이후 반짝 회복됐던 매출이 다시 꺾였다며 울상입니다.

올림픽의 유혹을 뿌리치며 잡은 책이 『매혹과 열광』(돌베개)이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 문학부 한스 U. 굼브레히트 교수가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스포츠의 매력, 특히 스포츠 관전의 매력을 분석한 책입니다.

저자는 스포츠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스포츠는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스포츠 관전은 가장 강력하고 대중적인 현대의 ‘미적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문학 작품이나 음악·그림·공연물 등과 마찬가지로 스포츠를 통해서도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저자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칸트의 미학 이론을 끌어왔습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르면 ‘아름답다’는 판단은 ‘순수하고 사심없는 만족’을 느끼는 상황에서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굼브레히트 교수는 이 중 ‘사심없는’이란 단어에 주목합니다. 스포츠 관전이야말로 사심없는 행위라는 것이지요. 응원하는 팀이 선전하는 모습을 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기록을 깨는 모습을 관전한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어떤 수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지위나 은행계좌에 긍정적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런 ‘일상생활과 절연된 속성’이 스포츠 관전을 미적 체험으로 승화시킨답니다.

스포츠 관전을 통해 ‘에피파니(epiphany·진리의 순간적이고 예술적인 현현(顯現))’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저자의 주장입니다. 농구의 덩크슛이나 야구의 도루 상황에서처럼 어떤 신체가 예기치 않게 등장했다 재빨리 사라지면서 갑자기 아름다운 형태를 띠는 것이 일종의 ‘에피파니’라는 설명이지요.

저자는 책 후반 상당부분을 자신에게 감동을 줬던 수많은 운동선수들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할애했습니다. “스포츠를 관전함으로써, 우리는 재능도 시간도 없어서 살아볼 수 없는 어떤 삶을 상상 속에서나마 향유할 수 있는 법”이란 게 감사의 근거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도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에서 역전 3점 홈런을 친 한대화, 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막판 스퍼트를 냈던 황영조, 2004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여준 여자 핸드볼팀 등. 그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아름다움으로 채워준 ‘예술가’ 아니겠습니까.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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