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현인 얻는 데 수고하고 현인 임용해 편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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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통령한테 휴가기간 동안 『인정(人政)』이란 책을 읽어보시라 권했었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인 최한기가 지은 인사지침서다. 거듭된 인사 난맥으로 상할 대로 상한 국민들 마음을 한 차원 높은 고품격 인사 기술로 감동시켜 달라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은 그 대신 자신이 비서들에게 나눠줬던 책을 다시 읽었나 보다.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 돌파의 CEO 윈스턴 처칠』 말이다.

그중에서도 ‘돌파’라는 단어에 밑줄 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리 없다. 낙하산 인사는 안 된다는 소리로 귀에 못 박혔을 터건만 못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자리만 나면 은인이나 친구, 아니면 은인의 친구를 갖다 앉힌다. 과거 어느 정부도 낙하산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염치라도 있는 거였다. 이 정부처럼 “총선 낙천·낙선자 6개월간 공직 금지” “관료·정치인 배제 민간전문가 우선” 같은 허언을 남발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겉으로 듣기 좋은 말은 혼자 다 하고 속에선 할 짓 못할 짓 다하는,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이 정부의 낙하산 보은인사 사례를 열거하는 건 공연히 숨만 가쁘다.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긴 줄이 공기업 사장·감사 자리를 보고 늘어서 있다. 말로는 대통령과 같은 정치철학을 공유한 사람들이라지만 한눈에 봐도 국회에 못 들어간 정치 낭인들이요, 보직 없이 떠도는 인공위성 공직자들이다. 처음엔 눈치라도 보는 것 같더니 이젠 대놓고 한다. 어차피 인기도 바닥인 마당에 친위세력들로 정권의 몸집이라도 불려놓는 게 향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는 손익계산서가 나온 모양이다. 노무현 정권의 낙하산인 정연주 KBS 사장이 물러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몰아내려 안달하는 이 정부의 태도가 마뜩잖았던 이유다. 이 정부 하는 모양새를 봐서 어차피 낙하산의 상표만 ‘MB 표’로 바뀔 게 뻔하지 않으냔 말이다.

어쩌면 대통령은 지금이 인사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많은 때라고 믿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빈자리를 채우고 자기 뜻에 따라 일을 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현인을 얻는 데 수고하고 현인을 임용해 편안하다”는 옛말이 있다. 바른 인사를 하는 데 수고를 아끼면 결국 인사권자가 수고롭게 된다는 말이다. 대통령을 지지하던 민심이 어쩌다 모두 등을 돌리게 됐는가를 되새겨보면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다.

대통령이 마음 먹은 일을 편안하게 추진하려면 먼저 인사부터 공을 들여야 한다. 널리 듣고 고루 써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민심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고 악의적인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비결이 『인정』에 있고 그래서 읽어보라고 한 거였다. 겨울휴가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으니 한마디는 대신 읽어 드려야 할 것 같다. “백성들과 함께하는 게 왕도정치의 급선무인데 식견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널리 공의(公議)를 모은다는 것이 단지 측근의 아첨하는 자들 입에서 나온 것이라, 간사한 자들의 사사로운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니면 반드시 뇌물을 써서 벼슬을 부탁한 자들일 것이다. 이것이 습관을 이루어 견문이 굳게 막히면 참으로 사람을 쓰는 방략(方略)을 아는 자는 멀리서 그 소문만 듣고도 물러가 숨고 허망한 부귀나 엿보고 꾀하는 자들이 떼를 지어 날뛰게 되니, 끝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기대하는 바가 바뀌어 원한이 되기에 이를 것이다.”

인사를 섣불리 생각했다면 등골이 오싹할 이야기다. 정부는 심기일전 재도약의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래서 비슷한 굴곡이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녕 사르코지에게는 배울 게 있다. 그것은 정치철학이 다른 반대 진영에서도 인재를 골라 쓰는 통합의 정치지, 샹젤리제 거리를 광화문 한복판에 옮겨 놓는 토목공사 정치가 아니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