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과속방지턱까지 찾아내는 ‘21세기 김정호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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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12면

엠앤소프트 진유석 대리(오른쪽)와 김승철 주임이 7일 충남 당진 현대제철 앞에서 새로 난 길과 지형지물을 점검하고 있다. 두 사람이 작업을 위해 하루 동안 달리는 길은 400㎞를 넘는다. 최정동 기자

손 아닌 발로 만드는 내비게이션
7일 오전 10시 충남 당진 버스터미널 앞. 내비게이션용 디지털 지도 제작사인 엠앤소프트의 진유석(31) 대리와 김승철(25) 주임은 이날로 집을 나선 지 나흘째다. 출장이 끝나려면 아직도 열흘은 더 있어야 한다. 전날 천안 일대를 돌아다니다 모텔에서 자고 이날 오전 당진으로 넘어왔다.

車 내비게이션이 ‘참 아는 게 많은’ 까닭

두 사람의 사무실은 ‘길’, 업무 영역은 충남북과 대전 지역 전체다. 애마 겸 사무실인 배기량 2000㏄의 디젤 스포티지 안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 연결된 노트북 하나와 내비게이션 세 대, 캠코더 한 대가 마련돼 있다. 매일 오전 노트북을 켜고 처음 확인하는 것은 ‘PPR(Product Problem Report)’이다. 고객이 보내온 제보나 신문기사 등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길에 대한 정보를 담은 보고서다. 이날 할 일은 당진 현대일관제철소와 인근 아산산업단지를 거쳐 서산~안면도까지 가면서 새로 난 길과 건물을 확인하고 노트북에 표시하는 것.

당진 현대제철 쪽으로 들어서니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내비게이션에 표시되지 않은 왕복 6차로 길이 공장 앞쪽으로 시원스럽게 뚫렸다. 지난 4월 현장답사를 할 때만 하더라도 야산 기슭이었던 곳이다. 도로를 따라 A·B·C로 나뉜 지구마다 출입문이 두세 개씩 만들어지고 있다. 새로 난 길을 따라 차가 달리니 GPS가 연결된 노트북에 차량의 궤적이 점선으로 표시된다.

진 대리는 “그려진 궤적을 바탕으로 디지털 지도에 새 도로를 그리게 된다”며 “좌회전이나 유턴이 가능한지, 출입문 구분이 어떻게 되는지는 일일이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조사팀 차 안에는 GPS가 연결된 컴퓨터와 내비게이션이 장착돼 있다. 최정동 기자

공장 옆 부두에 딸린 세관 구역으로 들어서자 굳은 인상의 경비가 다가온다. “어떻게 왔어요?” 신분을 밝히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경비는 퉁명스레 “부두 세관”이라고 대답한 뒤 “그거 하나 알려고 여기까지 왔느냐”고 타박을 준다. “여기는 함부로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니 빨리 나가라”고 경고까지 한다. 진 대리는 매양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히려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핸들을 돌린다.

흔들거리는 차 속에서도 노트북 위의 손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주변에 새로 생기거나 이름이 바뀐 건물의 정보를 수정하는 것이다. 차량 운전 및 보조를 맡은 김 주임은 진 대리가 놓친 주변 정보를 챙겨 알려준다.

두 사람은 왕복 2차로 지방도를 따라 가다 덕마리라는 곳에서 산 쪽으로 난 비포장도로로 차를 몰았다. ‘회사 진입로를 표시해 달라’는 고객 제보 때문이다. 공장인 듯한 건물이 나타났지만 어디에도 회사 이름이 안 보인다. 고객에게 전화를 하고 나서야 회사 이름인 ‘글로벌시스’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에 사각형으로 건물 모양을 그린 뒤 이름을 입력한다.

진 대리는 “혼자 한 달에 1000건을 제보하는 고객도 있다”며 “자기 집 상가의 1층 수퍼마켓과 2층 미용실 등을 모두 표시해 달라는 개인적인 요청도 기본적으로 현장을 찾아가 확인하고 지도에 반영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두 사람의 작업은 서산~안면도까지 이어진 뒤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이날 하루 입력 작업은 총 480회, 주행거리는 430㎞다.
 
첨단과 3D가 동시에
내비게이션에 쓰이는 디지털 지도 제작은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3D(Difficult, Danger, Dirty)’ 작업이다. 여름엔 땡볕과 졸음을 이겨내며 하루 400여㎞를 운전해야 한다. 웬만한 택시기사 하루 주행거리보다 많다. 일단 지방으로 출장을 나서면 최소 2주, 길면 한 달도 걸린다. “산과 들로 다니며 팔도 유람을 하니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약 올리는 격이다. 회사에 갇혀 상사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길과 건물을 확인하며 달리다 보면 팔도를 유람할 여유는 없다.

도로 한가운데 서서 위험하게 사진을 찍어야 하거나 어쩔 수 없이 불법 U턴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차를 움직일 수 있다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겨울엔 눈과 얼음이 목숨을 노린다.

김 주임은 “올봄 충북 괴산을 거쳐 산길을 지나다 녹지 않은 눈 속에 오후 내내 갇힌 적이 있었다”며 “결국 119에 구조 요청을 해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객과 함께 만드는 지도
내비게이션용 지도 제작의 시작은 국토지리정보원의 ‘수치지도’다. 항공촬영 사진을 바탕으로 길과 좌표가 표시된 ‘원(原)지도’다. 그림으로 치면 밑그림인 셈이다. 여기에 디지털 지도 제작업체들이 주요 건물과 길 표시 등을 그려 넣는다. 수시로 생겨나는 새 도로도 지도 제작업체들의 몫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수치지도는 5년에 한 번만 수정되기 때문이다.

엠앤소프트의 경우 35개 팀 70명의 지도 제작 현장조사팀이 있다. 전국을 서울·경기와 강원·경북·경남·전라·충청 등 6개 권역으로 나눠 활동한다. 이들은 두 달에 한 번씩 현장을 답사하고 정보를 수정한다. 1년에 한 번은 전국적으로 실사에 나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도 제작 현장조사팀은 1년에 약 6개월은 지방출장을 다녀야 한다.

과속 단속 카메라나 과속 방지턱 정보는 2주일에 한 번씩 업데이트한다. 자주 수정해 주지 않으면 “단속에 걸렸다”는 등의 고객 항의를 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과속 단속 카메라 정보는 별도의 협력업체에서 제공한다. 우리나라에 엠앤소프트처럼 대규모 현장조사를 통해 내비게이션용 지도를 제작하는 업체는 모두 5곳. 운영 인력 규모도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적으로 약 400명의 인력이 내비게이션 제작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파워 유저(power user)’라 불리는 열성파 고객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평소 운전하다 달라진 거리 정보를 확인한 뒤 내비게이션 회사의 홈페이지나 포털 사이트에 이를 경쟁적으로 올리는 ‘내비게이션 매니어’다. 엠앤소프트에만 300만 명이 넘는 회원이 있다.

진 대리도 한때 파워 유저 중 한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 후 지리 정보 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엠앤소프트의 지도를 이용하면서 홈페이지에 잘못된 정보를 올리고 또 그것이 고쳐지는 재미에 푹 빠졌다가 아예 직장을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엠앤소프트 강병주 지도제작팀장은 “1년이면 바뀌는 도로·지리 정보가 30%나 된다”며 “모두 현장을 직접 다녀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 팀장은 “소비자와 회사 간 쌍방향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소위 ‘웹2.0’식 공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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