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한다는 생각만 안하면 뭐든 이뤄낼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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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영국 BBC3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 여덟 명의 모델 지망생이 등장했다. 이들은 남달랐다. 휠체어를 타거나 의수를 착용한 사람도 있고, 말을 전혀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패션모델을 선발하는 리얼리티 쇼이기 때문이다.

이 채널이 7월 한 달 동안 방영한 쇼의 제목은 ‘브리튼스 미싱 톱 모델(Britain’s Missing Top Model)’. 신인 모델을 발굴해 에이전시 계약, 잡지 모델 데뷔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모델이자 방송인인 타이라 뱅크스가 진행하는 ‘도전!슈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과 비슷하다. 다만, 대상자가 조금 색다를 뿐이다.

화보 촬영과 캣워크(패션무대 워킹) 등 한 달에 걸친 경쟁 끝에 지난달 31일 우승자가 결정됐다. 선천적으로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는 켈리 녹스(23·사진)였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패션잡지 ‘마리클레르’ 영국판 9월호 커버 모델이 됐다. 잡지 출간에 맞춰 데일리 메일을 비롯한 현지 언론은 켈리와의 인터뷰를 잇달아 실었다.

데일리 메일 인터뷰에서 켈리는 “프로그램 지원자 모집을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 신청했다”며 “정작 나는 장애를 의식하지 않는데, 사회가 내게 장애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는 걸 방송 출연 뒤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 재키는 집에서 장애(disability)란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딸을 배려했다. 어머니가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하도록 가르친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옷을 혼자 입고 식사도 한 손으로 거뜬히 해냈다. 다섯 살 땐 한 손으로 자전거 타는 법도 배웠다. 큰 불편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곱 살부턴 거추장스럽고 무겁다며 의수 없이 왼팔을 드러낸 채 다녔다.

“클럽에 춤을 추러갈 때도 민소매 옷을 입는다. 팔 끝을 가리려고 펄렁거리는 긴 소매를 입는 건 불편한 일이다. 장애란 게 창피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이 한 번 더 뒤돌아보지만 상관없다.”

방송 덕에 ‘장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는 그는 이를 계기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더욱 넓어졌다고 말했다. 다른 장애를 가진 출연자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두 팔을 다 가졌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특히 그는 출연자 중 교통사고로 뇌 손상을 입고 마비와 경련으로 고통받는 제니 존슨의 이야기를 했다.  우승 뒤 켈리는 영국의 ‘테이크2 모델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맺고 ‘마리클레르’ 화보를 촬영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케이트 모스, 퀸 등과 작업해 온 패션사진작가 랜킨이 촬영을 맡았다. 화보에서 그는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짧고 뭉툭한 왼팔을 드러냈다.

물론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패션계에서 켈리의 등장이 과연 커다란 전환점이 될 수 있겠냐는 지적도 있다.

그를 촬영한 랜킨조차 “켈리는 잠재력 있는 훌륭한 모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패션 업계에서 장애인의 외모를 포용할 수 있을지, 나도 자신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켈리는 “내가 좋은 선례가 됐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며 “‘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뭐든 이뤄낼 수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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