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현장에서>TK목장이 票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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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포항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포항북 합동연설회는 시골 장터와 운동회.잔칫집을 합친 분위기였다.딸보다 며느리를 내놓는다는 봄볕에 이마가 따가웠고 갯내음 섞인 봄바람이 끊임없이 모래 먼지를 몰고왔지만 넓은 운동장은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8명이 입후보한 이곳은 「포항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허화평(許和平.무소속)후보와 「포항의 새 기수」를 자처하는 윤해수(尹海水.신한국당)후보의 2파전으로 점차 압축되고 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12.12사건 관련 혐의로 수감중인 許후보의 연설은 부인이 연단 아래에서 유권자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대신했다.許후보의 26세된 딸은 검은색 옷차림에 「허화평후보의장녀」라고 쓴 어깨띠를 두른 채 운동장 구석구석을 돌며 인사하느라 땀을 흘렸다.
尹후보의 부인도 뒤질세라 청중속을 헤집고 다니며 연신 허리를굽히고 두손으로 악수를 청하기 바빴다.그 옆에서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매가 엄마 따라 고개숙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국회의원이 되려면 온가족이 몸을 던져야 한다는 현실을 실감하면서 한편으로는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항의 자존심,허화평후보를 살립시다』는 구호를 외치고 다니는 운동원에게 『許후보가 왜 포항의 자존심이냐』고 캐물었지만 「별 놈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전날 안동을 선거구에서도 무소속 권정달(權正達)후보 의 운동원에게 「안동의 자존심 권정달」이라는 구호에 대해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權후보나 許후보가 지금와서 스스로 「지역의자존심」이라며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마침 전두환(全斗煥)씨의 심부름으로 權후보 가 최규하(崔圭夏)전대통령에게 거액을 전달했다는 폭로내용이 이날 지방지의 머릿기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곳 유권자들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한 지방공무원은 이것을 『오래 차지하고 있던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빼앗긴 시어머니의 마음』과비슷할 것이라고 비유했다.
후보들의 김영삼(金泳三)정권과 신한국당에 대한 비난은 논리와관계없이 욕설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청중들은 환호와 갈채를 보내고 있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래서 그런지 여당후보들은 자신의 인물됨이나 공약 알리기보다우선 반(反)신한국당.반YS 정서 달래기에 안간힘을 쓰는 것이공통점이었다.장학로(張學魯)사건.대선자금 공개문제 등 수세적인부분에 대해서는 유권자들과 뜻을 같이한다며 야당후보 못지않게 열을 올리기도 했다.대권 후계 자에 대해서는 청중들의 불만이나관심이 대단한듯 했지만 『김윤환(金潤煥)대표.이수성(李壽成)국무총리가 모두 경북 출신인데다…』라고 얼버무려 넘기기 일쑤였다. 금품선거 시비는 대구보다 경북지역이 심한 것 같았다.도계(道界)인 죽령을 넘어서자마자 크기.색깔.모양이 똑같은 파란색 물통을 들고 나란히 걸어가는 노인 30여명의 행렬과 마주쳤다.
누가 봐도 「선거특수(特需)」였다.가만히 물통 뚜껑 을 들춰보니 사과가 반쯤 들어있었다.눈이 마주친 할머니는 「다 알지 않느냐」는듯 씩 웃어보였다.입후보자들은 유권자가 금품을 노골적으로 원하는데다 금품수수를 고발하면 오히려 욕을 먹고 감표(減票)요인이 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라고 했다.
『지금 이곳에서는 김영삼정권과 신한국당 욕을 해야 행세하는 축에 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돼 있어요.여기 뿐만 아니라 아마 경북 일대가 다 그럴겁니다.오래전에 대구에서 시작된바람이지요.』 장차 정치에 뜻을 두고 있다는 대구의 한 변호사는 대구.경북의 표심(票心)을 가늠하기는 정말로 어렵다고 했다.그러나 그는 지난번 대선(大選)때의 재판(再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었다.일부 무소속이나 자민련의 강세가 보이기는 하나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불만이자 대세(大勢)라는 것이었다.반YS 정서가 대단한 것은 틀림없지만 대안이 없어 「미우나 고우나」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바로 TK의 딜레마라고도 했다.하지만 「TK 목장의 표투(票鬪)」는 결국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을뿐 투표 하루전까지도 승부는 미궁속에 있다는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의 의견이었다. (논설위원) 權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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