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후보들의 말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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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삼국지(三國志)』등 중국의 고전을 보면 『세 치 혀로 굴복(혹은 설득)시키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싸우지 않고 말 몇마디로써 정치나 전쟁의 국면을 이 편에 유리하도록 만들겠다는 세객(說客)들의 장담이다.그러나 장담대로 성공하는 세객들도 많지만 실패해 혀(舌)를 뽑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세객들도 없지 않다. 여기서의 「세 치」는 물론 혀의 길이를 뜻한다.세 치는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0㎝에 해당한다.사람마다 키가 다르듯혀의 길이도 다를 테니까 세 치란 사람의 혀가 대충 그쯤 된다는 뜻일뿐 혀의 길이를 총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의 길이가 말을 잘하고 못하는,곧 달변(達辯)이냐 눌변(訥辯)이냐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인식은 꽤 보편화돼 있다.『혀가 길어 잘 나불댄다』거나 『혀 짧은소리를 한다』는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혀의 길이에 따른 달변과 눌변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진 못한다는 점이 중요하다.청산유수처럼 말잘하는 세객이 설득에 실패하는가 하면,과묵한 세객이 절제된 몇마디 말로써 설득에 성공하는 『삼국지』등의 예에 서도 잘 엿볼수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중국 전국시대때 소진(蘇秦)이 만들었다는 「췌마술(취摩術)」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이 말의 기술이 아니라 설득상대의 마음을 읽는 기술,즉 독심술(讀心術)임을 강조한다.
마음을 읽지 못하는 한 해박한 지식도,과감하게 말할 수 있는용기도,달변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는 얘기다.
말을 잘하고 잘 못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느냐 아니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번 4.11총선의 유세과정에서도 예외없이 입증되고 있다.투표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끊임없이,무진장 쏟아져 나오는 후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사자후(獅子吼)의 달변이다.하지만 유권자의 마음을 읽기는커녕 쓴웃음만 짓게 하는 욕설.비방 등 시정잡배들의 쓰레기같은말들이 판을 친다.그러다 보니 (혀가 길어) 말 잘하는 후보들에게는 믿음이 덜 가고,오히려 ( 혀가 짧아) 어눌한 후보들에게 공감과 동정이 간다는 유권자들도 많다.유권자의 속마음을 모르는 후보들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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