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작은 遊說場이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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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세기 최고의 사진작가로 꼽히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은 특이하다.망토를 입고 실크 모자까지 쓴 엄격한 모습의 노인이 가로수 우거진 큰 길을 가면서 뒤돌아 노려보고 있다.그의카메라 앵글은 대체로 전면 아닌 뒷면이다.집회장 연사의 앞 모습이 아니라 군중들 틈새에서 졸고 있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바람에 휘날리는 신문지 조각과 담배꽁초를 그의 카메라에 담는다.서울의 첫 합동 연설회장을 찾아가면서 나도 브레송처럼 유세장 뒷모습을 보려고 했다.
막상 유세장에 가 보려니 언제 어디서 하는 지를 몰랐다.세명의 이웃에게 물었지만 모두 몰랐다.유세장에 가서 뭘 하느냐,후보들 말 그게 그것인데 이 쌀쌀한 날씨에 뭘 구경할 게 있다고가느냐며 모두가 나무랐다.신문사에 물어보고서야 알아낸 한 중학교 유세장엔 뜻밖에 2천명 가까운 많은 청중이 모여 있었다.처음엔 이 모두가 선의의 청중,지역 대표를 뽑기 위해 모인 관심의 시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당 후보 연설이 끝나자 마자 자리가 술렁이고 대열이흩어지면서 입구쪽으로 긴 행렬이 늘어섰다.뒷자리 벤치에서 보기로는 청중의 과반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듯 했다.다시 한번 대열이 갖춰지더니 야당 거물인사가 등장했다.야당 후보 연설이 끝날 무렵 뒷자리의 운동원이 「자리를 지키자!」고 큰 소리를 쳤지만 이미 남은 청중의 반은 입구로 쏟아지고 있었다.무소속 젊은 후보가 등장했지만 관심갖는 청중은 별로 없었다.여당.야당운동원들이 교문 앞에서 후보 이름 을 연호하며 맞대결을 벌이는소리만 높았다.
결국 2천명 청중이란 대부분이 후보 운동원들이었다는 소리밖에되질 않는다.청중은 없고 운동원만 있는 유세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선의의 청중이 모이지 않으니 후보들은 세몰이를 위해 청중을 동원하고 일당을 지급할 수밖에 없다.
그날 저녁 뉴스 추적 프로에는 「동조직이 뛰고 있다」는 부정선거 고발 시리즈가 나오고 있었다.선거기간중 투표구.통.반조직책을 운영하는 데만 몇억원이 든다는 계산을 했다.여기에 1천명청중을 동원할 경우 1인당 5만원이면 5천만원, 10만원이면 1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선거부정을 후보가 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시민이 조장하고 있는 꼴이다.한 후보가 선거 기간중 쓸수 있는 법정 평균비용 8천1백만원이란 애당초 지킬 수 없는 법이다.법 따로 관행 따로니 선거부 정은 예나 지금이나 그치질않는다.돈 받는 사람도 시민이고 돈 받는 풍토를 조장하는 것도우리 시민이라는 각성없이 후보만 나무라면 우리의 후진 정치는 개선될 수 없다.
이튿날 오후 4시쯤,사무실 밖 자투리 공원 쪽이 시끄럽다.확성기를 통해 후보의 로고송이 울려오고 청중을 부르는 선거운동원들이 10여명 공원 주변에 도열한다.후보의 아내인 왕년의 뉴스사회자가 나와 30분부터 연설회를 한다고 알린다 .호기심이 발동해 공원으로 나가보니 동네 목욕탕주인도 나왔고 설렁탕집 아주머니도 아는 체 한다.
약속 시간에 후보가 점퍼차림으로 나타났다.그 또한 왕년의 앵커맨답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왜 이번 총선에 나섰고 앞으로 무얼 할지를 대화하듯 말한다.자신은 대권을 노리는 큰 정치를 하지 않고 생활정치,시민정치를 하며 낙후된 도심 지역구를 어떻게 발전시킬 지를 역설한다.이어서 질문 토론시간.한 아주머니가나서서 후보의 혼외정사가 한 가정을 파탄낸 것 아니냐고 따진다.후보 아내는 감정이 격한 듯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정상을 되찾고 옆에 선 두 아들을 인사시킨다.돌아가신 어머니는아이들을 이렇듯 훌륭히 키우고 갑자기 돌아가셨다면서 그후 결혼까지의 이야기를 설명한다.계획된 질문과 답변인지는 몰라도 즉석에서 이뤄지는 주민과의 대화는 주민 궁금증을 풀어주는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국회의원 선거란 주민 대표를 뽑는 주민의 일이다.남의 일 아닌 나의 일이다.자투리 공원의 자투리 연설회가 발전해 주민들이직접 참여해 묻고 따지는 직접정치가 우리의 3류정치를 조금씩이나마 개선하는 길이라고 본다.술자리서 안주 삼아 떠드는 정치 가십이 정치를 음성화하고 정치를 나의 일 아닌 남의 일로 바꾸며 청중없는 운동원끼리의 유세장을 만든다.후보들을 멸시하고 정치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을 수록 우리 정치는 3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정치란 정치인과 시민이 함께 만들어 내는 우리 자신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꽃샘추위 속의 유세장 풍경에서 확인하고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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