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대화 <47> ‘대만의 사마천’ 언론인 롄야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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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대륙으로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한 롄야탕(오른쪽에서 둘째). 맨 왼쪽이 롄잔의 부친 롄전둥(連震東). [김명호 제공]

푸젠(福建)성 룽지(龍溪)현의 롄(連)씨들은 명(明)이 만주인에게 멸망하자 대거 대만으로 이주해 타이난(臺南)의 닝난팡(寧南坊) 마빙잉(馬兵營)에 정착했다. 고목이 울창한 곳을 지나자 안개 속에 끝없이 펼쳐진 연꽃들이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역 특산물인 사탕수수의 즙을 끓여 백당을 제조하며 약 200년간 타이난의 망족(望族)으로 자리 잡았다.

1895년 갑오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 내주었다. 롄씨들이 대대로 운영하던 점포 팡란(芳蘭)과 작업장 인근에 일본의 현대적인 제당공장이 들어섰다. 6대에 걸쳐 운영하던 가업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고 농토마저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각자 살길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7대손 롄야탕(連雅堂)이 18세 때였다.

가업의 도산을 지켜본 롄야탕은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타이펑일보에 취직해 중문부주편으로 6년간 경험을 쌓은 뒤 1905년 대륙으로 건너갔다. 샤먼(廈門)에서 푸젠일일신보를 창간했다. 쑨원(孫文)이 동맹회를 설립한 직후였다. 버려진 땅의 유민이었지만 공개적으로 반청 혁명사상을 전파해 동남아 일대의 동맹회 회원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는 항상 신변에 위협을 받았다. 이발 도중 체포하러 온 사람을 피해 달아나느라 머리를 깎다 만 흉한 모습으로 도망 다녔고 신문사 출근 도중 헐레벌떡 달려와 알려준 친구의 도움으로 암살의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신문은 폐간당했다. 처음 쏘아 올린 폭죽은 불발탄이었다. ‘전달해야 할 여론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졌지만 잠시였다. 롄야탕은 ‘여론을 창출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이며 ‘국가의 흥망은 신문의 책임’이라고 확신했다.

식민지 대만으로 돌아온 롄야탕은 1908년 대만문화운동의 중심지 타이중(臺中)으로 이주해 대만신문사 중문판을 제작하며 『대만통사(臺灣通史)』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스스로 대만의 역사를 쓰지 않으면 일본인 손에 일본어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와 ‘남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신만 살아 있으면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역사 편찬의 동기였다.

롄야탕은 언론인과 역사가를 동일시했다.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책벌레가 아니었다. 대만은 물론이고 대륙과 일본의 전역을 유력했다. 가는 곳마다 길게는 3년, 혹은 몇 달씩 머무르며 신문사에 일자리를 구해 사소한 것도 흘려듣지 않았다. 동북, 윈난(雲南), 쓰촨(四川) 등 발길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가는 곳마다 유기(遊記)와 시작(詩作)을 남겼다.

1918년 순전히 혼자 힘으로 『대만통사』를 완성한 롄야탕은 『대만고적지(古蹟誌)』와『대만어전(語典)』등을 연달아 펴냈고 타이베이의 상업 중심지 대도정(지금의 延平北路)에 중국 전문서점을 차려 대만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강연을 열었다. 매번 총독부에서 중단시키는 바람에 끝까지 진행된 적이 거의 없었다.

롄야탕은 36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산을 앞둔 며느리에게 ‘중국과 일본은 기필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길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롄잔(連戰)’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두 달 후 손자가 태어났다. 며느리는 그대로 했다.

롄잔은 엘살바도르 대사로 관계에 진출해 교통부장, 외교부장, 대만성 주석, 행정원장, 직선 부총통을 거쳐 국민당 주석으로 총통 선거에 두 차례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를 평할 때 학문이 뛰어나고 ‘품종’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대만 4공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런 말을 듣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어림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롄야탕은 대만 문화와 언어의 보존을 위해 평생 고심했고 대만인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최초의 대만인이었다. ‘대만의 사마천(司馬遷)’ ‘일본의 식민지였던 50년을 통틀어 문화계의 제1인’ 소리를 듣는 유일한 대만인이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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