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한마디에 내각제 초안이 하루새 대통령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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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국회의장. 단 위에 서 있는 이승만 의장 앞줄에 유엔 임시한국위원회 대표 및 미 군정 수뇌들이 앉아 있다. [중앙포토]

“만일 (의원내각제)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이 헌법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반내각제) 국민운동을 하겠다.”

1948년 6월 21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 헌법안 조문 검토를 위한 헌법기초위원회의 마지막 회의장에서 이승만 임시 국회의장이 던진 말이다. 정치적 협박에 가까운 이 말의 파장은 컸다.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국’으로 새로 탄생하는 대한민국의 정부 형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돌려 세운 결정적 사건이 됐다.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는 “제헌 과정에선 경제체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노동자의 이익 균점권, 그리고 농지개혁과 반민족 행위자 처벌의 근거 조항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지만 신생 정부의 정치적 주도권을 가름하는 정부 형태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권력구조를 결정한 하루=헌법기초위원회가 만장일치로 준비한 초안의 정부 형태는 48년 6월 21일 아침까지 의원내각제였다. 이승만의 폭탄선언으로 헌법기초위원회를 주도해 온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수뇌부는 바빠졌다. 이날 밤 서상일·김준연·조헌영 등 한민당 중진들은 서울 계동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집에 모였다. 김성수는 한민당의 실권자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동아일보 주필 출신 김준연 의원이 나서 초안을 대통령중심제로 고쳤다. 6월 3일부터 18일간 30명의 헌법기초위원이 합의해 결정한 의원내각제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내각제 초안을 기초한 헌법기초위 전문위원 유진오도 이 자리에 불려왔다. 그는 이날 낮에도 이승만을 만나 “대통령제 헌법을 채택한 나라 중 별탈 없이 잘 되어 나가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며 “미국식 대통령제를 쓰는 중남미 제국에선 국회와 정부의 대립 상태를 합헌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어 툭하면 쿠데타 아니냐”고 설득하고 돌아온 터였다.

“앞뒤 연락(연결)은 되느냐”는 김준연의 질문에 유진오는 “(앞뒤가) 연락(연결)은 된다. 그러나 앞으로 헌법 제정사업에는 관계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다음 날 헌법기초위는 장시간 토론 끝에 대통령중심제를 뼈대로 한 수정된 초안을 통과시켰고, 이 안은 23일 제17차 본회의에 상정됐다. 조선대 법대 이영록 교수는 “당시 이론적 상식으론 민주주의는 곧 내각책임제였고, 대통령제는 독재를 초래하기 쉬운 정부 형태였다”며 “나치 독일이나 전체주의 일본은 행정권이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1인에게 집중된 데 원인이 있다는 게 학문적 정설이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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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과 중도세력이 빠진 채 힘을 합쳐 총선을 치렀던 이승만과 한민당은 왜 서로 다른 길을 고집하다 벼랑 끝까지 왔을까.

단선 추진 과정에서 토착 우파 세력인 한민당과 미국에서 들어와 국내에 조직적 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의 전략적 제휴는 권력 창출 이후 틈이 벌어졌다. 원내 다수당인 한민당은 이승만을 얼굴로 삼아 국회 중심의 실권을 얻으려 했지만 이승만은 자신이 강력한 리더가 돼 건국기의 총체적 혼란을 책임지고 수습해야 한다고 믿었다. 북한의 공산 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된 상태여서 그의 믿음은 어느 때보다 컸다. 원내 양대 세력의 한판 힘 겨루기의 승자는 이승만이었다. 제헌 과정의 정치를 연구한 서희경 박사는 “거의 절대적인 대통령 후보로 여겨졌던 이승만이 내각제 헌법안을 반대한다면 정부 수립 자체가 늦어지고 한민당의 집권 가능성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배경을 짚었다.

◇의원내각제냐 대통령중심제냐=밤새 뒤바뀐 헌법안의 국회 통과가 매끄러울 리 없었다. 28~29일 벌어진 대체토론에선 내각제 옹호 세력과 대통령제 주장 세력의 논리 대결이 치열했다. 77명이 발언을 신청해 51명이 연단에 올랐다. 서면으로 대신한 의원도 많았다. 한민당의 내각제 포기로 무소속과 일부 단체 소속 의원들의 권력 독점에 대한 우려는 커졌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 등 친이승만파는 대통령제 대세 굳히기에 나섰다. 다음은 당시 국회 속기록의 일부다.

“우리가 신생국가 건설에 있어 비약과 전환을 요하며 쇄신과 추진을 희망한다면 대통령책임제를 채용해야 한다. 의원내각제로부터 배태되는 (대)정부 투쟁에 관한 흑막과 알력을 제거하고 안정된 경우(상태)에서 일의전심, 국민의 복리증진에 노력할 수 있는 정부를 갖게 될 것이며 신속 과감한 행정을 약속할 것이다.”(독촉 진헌식 의원)

“정국 안정의 원리가 더욱이 민주정권 국가에서 대통령 집권주의의 실시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 현실에 있어 정부가 국회와의 긴밀한 협조를 얻지 못하고는 결코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없다…원내 대다수 국회의원을 포함한 대정당이 출현한다면…그야말로 우리 비상시의 정국 안정을 담당하고 모든 건설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가 실현될 수 있다”(무소속 김장렬 의원)

좌·우의 극한 대립과 식량난에 인플레이션까지 총체적 혼란을 겪던 건국기의 궁극적인 정치 목표가 ‘안정’이라는 데는 양쪽에 이론이 없었다. 그러나 내각제론자들은 내각과 국회가 유기적 관계를 맺는 것이 정국 안정에 유리하다는 명분을 강조한 반면 대통령제 주창자들은 ‘건국 초기 혼란’이라는 정세를 활용했다. 신속한 ‘나라 만들기’를 위한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정부 수립을 목표했던 광복 3주년 8월 15일이 다가오면서 무게 추는 점차 대통령제 쪽으로 넘어갔다. 7월 5일과 6일엔 이승만이 직접 사회를 맡아 조문 통과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5일 “8월 15일이 며칠 안 남았다”며 “헌법의 대지(큰 뼈대)만 통과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본회의 과정에서 제기된 수십 건의 수정안은 이 같은 분위기에 밀려 속속 철회됐다. 7월 12일 국회는 제28차 본회의를 열어 103개 조 헌법안을 기립 표결로 통과시켰다. 사회를 보던 이승만은 “한 분도 빠짐이 없으니까 전체가 통과된 것이니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좌중에선 박수가 터졌다.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순)=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김종해 국회사무처 자료조사관, 서희경 진실화해위원회 팀장, 이영록 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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