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학살범 추적 급물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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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기간 중 자행된 인종 대학살의 주범 라도반 카라지치(63)가 21일 체포됨에 따라 다른 전범들에 대한 추적에도 가속이 붙고 있다. 독일 dpa통신은 23일 카라지치와 함께 학살을 주도했던 군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66)와 고란 하지치(50)의 검거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10여 년에 걸친 카라지치의 대담한 위장 생활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카라지치 다음은=믈라디치는 세르비아계 군사령관으로 1992~95년 내전 당시 사라예보를 공격해 1만2000여 명을 학살한 혐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 유고전범재판소(ICTY)에 기소된 상태다. 또 사라예보 동부 스레브레니차에서 이슬람계 주민 8000여 명을 학살한 혐의도 받고 있다. ICTY 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이슬람계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마을 광장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죽이기 전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며 사탕을 나눠주고 머리까지 쓰다듬었다고 한다.

세르비아 정부도 카라지치보다 믈라디치 검거를 최우선시할 정도로 그를 주요 전범으로 취급하고 있다. 세르비아 정부가 믈라디치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을 펴던 중 우연히 카라지치의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후문도 나오고 있다. 내전 후 믈라디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이름을 딴 염소를 집에서 기르며,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시내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 축구 경기도 관람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2003년 그를 체포하기 위해 500만 달러(약 50억원)의 현상금을 내걸자 잠적해 버렸다.

세르비아에서 믈라디치는 여전히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부 젊은이는 믈라디치의 얼굴과 함께 ‘세르비아의 영웅’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다. 믈라디치는 여전히 세르비아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르비아 군부의 일부 추종 세력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CTY에 기소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하지치의 행방도 묘연하다. 하지치는 내전 당시 민병대를 동원해 세르비아계가 주로 살고 있던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계 수백 명을 추방하고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미 국무부 홈페이지에도 보스니아 내전의 전범으로 사진과 함께 그의 혐의가 올려져 있다. 카라지치의 체포로 인해 헤이그의 ICTY 법정도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ICTY에는 지금까지 전범 161명이 기소돼 56명이 유죄 판결, 10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36명은 피고인 사망 등의 이유로 재판이 중단됐다.

◇대담한 도피 생활= 세르비아 정부는 카라지치의 대담한 도피 행각에 대해 비밀 경찰의 보호 덕이었다고 밝혔다. 이비차 다치치 세르비아 내무부 장관은 이날 “세르비아 비밀 경찰이 그동안 카라지치를 보호해 왔다”고 말했다고 독일 dpa통신이 이날 현지 데일리 프레스를 인용해 23일 보도했다.

수염으로 용모를 바꿔 대체의학 의사로 살아온 카라지치는 비디오를 통해 지역사회센터의 강연에 나서는 등 대담한 행동도 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같은날 보도했다. 카라지치는 의사로서 자신의 명성을 알리기 위해 잡지 ‘건강한 생활’에도 정기적으로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카라지치를 만났다는 마자 델리치(28·여)는 “말투에서 그의 출신인 보스니아 억양을 찾기 힘들어 지역사회의 저명인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카라지치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해 잡히기 직전 온천여행 계획까지 세워놓았다”고 전했다.

22일 베오그라드 도심에서는 카라지치의 체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과격 시위가 벌어졌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카라지치의 초상화가 그려진 옷을 입은 시위대는 카라지치의 체포를 ‘세르비아의 죽음’에 비유하며 세르비아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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