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꾹 찍어 옮긴 옛 몽골의 숨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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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06면

알탄 상달 사슴돌 탁본

밖은 33도를 넘어서는 폭염이지만 안은 5000년 전 석기시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서늘하다. 15일 오후 대구광역시 황금로 200번지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 ‘돌에 새긴 선사 유목민의 삶과 꿈-몽골의 암각화·사슴돌·비문 탑본전(이하 ‘몽골 암각화 탑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은 잠시 몽골의 초원으로 공간 이동한다. 수백㎞를 달려도 사람 그림자 찾을 길 없는 들판과 사막, 맑고 높은 하늘에 그림처럼 걸린 구름 한 점이 드러난 대형 사진을 마주하고 서니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여기가 몽골이다. 마침 전국에서 찾아온 보살님 40여 명이 전시를 준비한 흥선(직지성보박물관장) 스님의 설명을 듣는 참이다. “작품은 제 마음으로 봐야지, 남이 하는 말 따라 보면 다 헛것입니다.” 스님 말씀에 관람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모은다.

‘몽골의 암각화·사슴돌· 비문 탑본전’ 현장

‘몽골 암각화 탑본전’은 4년에 걸쳐 진행된 한국과 몽골 학자들의 학술조사 프로젝트 결과다. 2005년 몽골을 여행하던 흥선 스님은 초원과 사막에 흩어져 있던 암각화에서 우리 암각화와 비슷한 도상을 발견하며 흥미를 느꼈다.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몽골 암각화를 연구했지만 대부분 위치를 파악하고 사진을 찍거나 트레이싱 페이퍼로 떠내는 정도에 그쳤다. 흥선 스님은 자신이 연마한 탑본 기술이 몽골 암각화의 원형을 제대로 잡아내는 데 제격이라 생각했다. 흔히 탁본(拓本)이라고도 부르는 탑본(榻本)은 쇠·돌·나무 등 단단한 물체의 표면에 양각 또는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그림·무늬 따위를 먹과 종이를 이용해 복사해 내는 동아시아의 전통 복제 기법. 반들반들 단단한 현무암에 얕게 각된 몽골 암각화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 탑본은 맞춤했다. 직지성보박물관 단독으로 일을 꾸려 가기에는 버거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와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소장 체벤도르지) 세 단체가 힘을 모으기로 협의하고 탑본을 석 점 떠서 각기 한 점씩 나눠 소장하기로 했다.

현지조사와 탑본 작업은 2006년과 2007년 2차에 걸쳐 한여름에 각기 한 달여씩 암각화 집중 분포지인 테브쉬 올(올은 ‘산’을 뜻하는 몽골어) 등지에서 이어졌다. 새벽 4시에 시작해 해질 무렵인 밤 10시에 마무리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자칫 유실될 위기에 처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탑본으로 기록한다는 뜻 깊은 일이라 조사단은 잠자는 시간을 줄여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갑자기 내린 폭우로 몸만 피한 위기의 순간, 4m 가까운 비문을 탑본하느라 여러 명이 트럭 위에 올라가고 달라붙어 벌인 서커스 아닌 서커스, 먹고 마실 물보다 탑본에 드는 물이 워낙 많이 필요해 날마다 인근 도시에서 물을 공수하던 일 등 도록 『돌에 새긴 유목민의 삶과 꿈』(비매품)에 담긴 조사단의 기록은 생생한 사진과 함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해서 전시장에 걸린 탑본 80여 점을 보면 암각화를 왜 ‘선사시대의 책’이라 부르는지, 사슴돌에 새겨진 무늬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고대 투르크 문자가 새겨진 비문이 중앙아시아사의 변천을 살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료로 꼽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다 제쳐 놓고 그냥 작품으로 봐도 아름답다. 소박하면서도 사물과 이치의 핵심을 잡아챈 원시미술의 특징을 몽골 탑본들은 응축하고 있다. 단순함이 뿜어 내는 힘과 미감에 관람객들이 진열창에 코를 박는다. 사진으로 볼 때는 잘 안 보이던 선과 면의 절묘한 조화가 탑본을 만나니 흑백의 묘수로 떠오른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변화를 암시하는 이미지들, 유목민의 삶을 읽어 내도록 이곳저곳에 배치한 상징 요소 등 오래 찬찬히 뜯어볼수록 진국이 우러나듯 석기·청동기·철기 시대의 인류사가 보인다.

흥선 스님은 “문화재 보존처리 전문기관인 고창문화재연구소에 특별히 부탁해 여느 탑본과 달리 오톨도톨한 표면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배첩 한 점을 눈여겨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전시는 8월 10일까지. 문의 054-436-6009(www.jikjimuseum.org), 053-768-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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