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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빼기의 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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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올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입학식에는 이례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 새로 대학에 들어오는 제자들을 위해 우리 학교 교직원 중창단원 교수님들이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에 나오는 노래를 개사까지 해 정성어린 환영과 축하의 노래를 불러준 것이다. 무척 감동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도 중창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지난해의 포부를 이루기 위해 이웃으로 지내던 성악 선생님에게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평소 노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심 당황스러웠던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목.입술 힘 빼야 노래 잘나와

성악 레슨을 시작하면서 처음 배운 것은 노래하는 자세다. 손은 자연스럽게 내리거나 모으고, 다리를 자연스럽게 벌려 편안한 자세로 호흡을 깊이 천천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본 원칙은 몸에 힘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야만 아름다운 소리가 멀리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첫시간부터 계속 목과 혀.입술의 힘을 빼는 발성 연습을 했다. 한가지 발음으로 노래할 때는 힘 빼기가 비교적 쉽지만 다양한 발음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아직 나는 가사를 붙이지 않고 발성연습을 위해 간단한 소리로만 노래 부르는 완전 초보 수준이다. 하지만 힘을 빼고 노래 부르는 연습을 하다 보니 짧은 기간임에도 노래 솜씨에 확실한 변화가 감지된다. 노래하기가 훨씬 편안하고, 소리가 고르게 나면서 저절로 성량이 커지고 낼 수 있는 음역도 넓어졌다. 힘을 빼고 노래하면 심지어 목감기가 들었을 때도 노래 부르는 데 크게 지장받지 않는다는 걸 경험했다.

힘 빼고 노래하기 연습은 여러 가지로 부수 효과를 낸다. 운전하면서도 노래하다 보니, 전에는 짜증났던 교통체증을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대하게 된다. 캠퍼스를 오가며 노래하면 마주치는 학생에게서 상큼한 미소로 인사를 받는다. 한껏 분위기를 살려 노래하면서 자유롭고 편안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리고 점점 노래솜씨가 좋아지고 있다는 성취감은 삶의 활력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욕을 북돋워준다.

힘 빼기의 묘미는 노래하는 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에 두루 통하는 것 같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노래 부르기의 자세는 바로 요가와 참선, 태극권이나 동양무술의 자세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춤사위도 몸에 힘을 빼야 곱다고 한다. 어떤 운동에서도 몸에 힘을 주고 하라는 가르침은 들어보지 못했다. 수영을 배울 때는 몸에 힘을 빼야만 잘 뜨고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골프도 힘 빼는 데 3년이란 말이 있다. 주사 맞을 때도 힘을 빼야 덜 아프다.

*** 정치판도 어깨 풀었으면…

힘 빼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아집과 집착, 욕심과 교만에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내가 꼭 가져야 하고 반드시 내가 이겨야 한다는 욕심이 날 때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 힘을 주지 힘을 뺄 수가 없다. 상대방은 틀리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강요하는 데 핏대를 세운다. 나만 잘났다는 마음으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여유를 갖기 어렵다.

정치도 힘 빼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닐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판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내일로 다가온 총선을 계기로 힘 빼기 정치가 시작되기를, 그리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정치 속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삶의 여유와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윤정로 KAIST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