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지 사이판의 "슬픈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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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우리에겐 휴양지나 신혼여행지로 잘 알려진 사이판.한해 20여만명이 야자수와 백사장을 찾아 떠나는 열대의 산호섬.
그러나 태평양전쟁당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한국인들이 징용.
징병.종군위안부로 끌려가 희생된 슬픈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약 3천㎞ 떨어진 울릉도만한 섬에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일본이 독일로부터 영유권을 넘겨받아 사탕수수농장을 건설하면서부터다.처음엔 경작지 개발에 동원되다가 1930년대부터 벙커.진지.비행장.항만등 군사시설공사에내몰렸다.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1939~45년 사이판을 비롯한 남태평양 일대에 1백50여만명의 한인들이 징발됐다.
이들은 일본군 수송선.화물선등에 실려 머나먼 남태평양의 여러섬으로 끌려갔다.긴 항해중에 이들 수송선은 대부분 미군 잠수함의 공격이나 기뢰에 맞아 침몰했다.
미군의 잠수함은 제2차세계대전중 5백급 이상의 일본군 수송선을 무려 1천1백13척이나 격침시켰다.총 수는 4백77만9천9백으로 전쟁전 일본이 보유했던 선박 총 수와 맞먹는 놀라운 숫자다.일본이 전쟁에서 잃은 함선중 55%가 미군 잠수함 공격에의한 것이었다.
사이판을 중심으로 남태평양 일대 바닷속에는 아직도 침몰된 일본군 수송선들이 즐비하다.특히 사이판 남쪽 「트럭 아일랜드」앞바다에는 수송선.군함.탱크.비행기 포탄들이 그대로 가라앉아 있어 마치 전쟁박물관을 방불케 한다.이곳에서는 최근 까지도 유골이 발견되고 있다.
사이판 서쪽 마리아나 포트 인근 해저에도 침몰된 일본군 수송선이 누워있다.해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많은 스쿠버다이버들이이 침몰선등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지난 한햇동안 한국인 다이버만도 1천여명,일본인은 2만여명이 다녀갔다.
단순히 유명 다이빙 포인트로 알고 있지만 『당시 일본수송선에는 수천명의 징용한인과 정신대 여인들이 타고 있었으며 미군 기뢰공격에 침몰,대부분 수장됐다』고 증언하는 생존 징용자들이 많다. 일본군은 잠수함을 피해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야 했기 때문에 항로를 수시로 바꾸고,지그재그식 항해를 해야만 했다.보급선이 끊기면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징용된 한인들은 심한 굶주림과 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미군의 사이판 침공개시 직전 사이판 주둔 일본군은 육군 2만5천4백69명과 해군 6천1백60명에 불과했다.6월중순에 시작된 전투는 7월9일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미군 1만6천5백여명,일본군 2만9천여명이 죽었다.이 가운데 한인징용 자는 얼마나될까.현재 정확한 자료는 없다.그러나 사이판 남쪽 5㎞ 떨어진티니언에 있는 일본인위령비에 따르면 티니언에서만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징용자 3천5백여명이 죽었다.당시 징용자라면 대부분한국인이었다.
현재 일본은 스스로 일으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남태평양 곳곳에 위령비나 평화공원.신사등을 세워 이곳을 찾는 자국 관광객들에게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 해저추모비 건립을 위해 유족회원들과 함께 참석하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 배해원(56)씨는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전쟁을 미화하면서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나서 추모사업을 곳곳에서 벌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관광코스로 적 극 개발하고있다』며 『중앙일보의 추모비 건립을 계기로 유족회 차원에서 추모사업과 역사탐방에 적극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이판=이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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