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진보를 해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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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클린턴 부처와 비교할 때 레이건은 반쪽의 뇌를 가진 공화당원조차 두 개의 뇌를 가진 민주당원보다 낫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미국의 유머 작가 패트릭 오로크(Patrick O'Rourke)의 익살이다. 내일 17대 총선을 맞아 나는 두개골 세어 가며 찍을 정당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쉬시기도" 뭣해 참 딱하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 제1당이 되며 제2당과 의석 차이는 얼마나 될지 따위는 관심에서 멀어지고, 차라리 진보 정당의 성적표나 기다리게 됐다.

*** 시류 영합 않는 게 보수의 미덕

이번 선거 구도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여러 '해설에' 나는 다소 뜨악하다. 보수와 진보가 지금 우리한테 그토록 중요한 쟁점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싸움에 맞설 진짜 보수와 진짜 진보가 어디 있느냐는 '꼬부장한' 반문이 따르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 의원 195명이 투표해 193명이 찬성했으니, 헛것에 씌지 않은 한 이는 대통령 탄핵에 절대적 확신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촛불집회와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삭발.사죄.철회 발언이 잇따랐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없다. 탄핵 반대가 확고한 소신이었다면 할복을 해서라도(?) 막고, 일단 찬성표를 던졌으면 국회의원의 오기로라도(!) 버텨야 정상이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것이 보수의 미덕 가운데 하나라면, 그들의 보수는 보수의 기초조차 배우지 못한 '사이비 보수'였던 것이다. 보수를 보수(補修)하라.

이라크 파병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 논쟁이 될 만하다. 지난 2월 추가 파병 동의안 표결에서 보수 아성 민주당은 '권고적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으나, 웬일인지 당대표는 당론을 거슬러 찬성표를 던졌다. 개혁을 등록상표로 들고 나온 열린우리당은 그 명분으로 봐서라도 반대 목청이 가장 높아야 했다. 그러나 당론은 찬성이었고, 반대파 중진들조차 막바지 표결에서 찬성으로 돌아섰다. 대통령이 결정했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다면 그게 무슨 개혁인가? 장렬한 전사는 역사적으로 진보의 덕목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진보는 진보의 이름만 빌린 '무늬만 진보'였던 셈이다. 진보를 해방하라.

이 시대 진보 세력의 책무는 가짜 진보로부터 진짜 진보를 구출하고 회수하는 일이다. 국회 입성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이 그 숙제를 해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무늬만으로 진보를 외치거나 사이비 진보로 눈속인 '원죄'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여당은 '정책 공조' 명분으로 민노당 우세 지역에서의 공천 포기라는 미끼를 던졌다. 그때 그 시험에 들지 말기를(!) 마음 졸이며 바란 사람이 여럿이었다. 재계 역시 노사 관계가 한층 '불온해질'것으로 불안하게 바라본다. 진보 정치는 그 불안을 풀어줄 책임이 있다.

민노당 선거대책위원장은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맡고 있다. 지난 2일 중앙일보 경제포럼에서 그는 2007년까지 국내 제조업의 40%가 해외로 나간다는 조사를 인용한 뒤 "우리 노동자들이 중국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위기감을 토로했다. 역풍과 부담을 무릅쓰고 "조건없이 대화하자"고 사측에 제의했다. 민노당의 뇌가 반쪽인지 두 개인지 더는 의심하지 말자. 노동자 이익을 대변할 기회가 제도 정치권에서 배제될 때는 결사 항전이 불가피하지만 의회에 통로가 마련되면 과격 투쟁을 고수할 이유가 없다고 다짐하는 진보 정치의 출현은 이 사회의 자산이지 부채가 아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이젠 버려야

사표(死票) 걱정과 '전술적 고려'는 진보 정당의 의회 진출을 가로막는 함정이었다. 어차피 안 될 후보라면 그를 찍어 내 표를 죽이기 아깝다는 유권자의 정서를 탓하기 어렵다. 정당 투표로 그 고민은 이번 총선에서 제법 해소될 듯하다. 그리고 '더 미운' 정당과 '덜 미운' 정당이 싸울 때, 진보 정당을 찍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미운 정당을 돕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진보 정당 대신 덜 미운 정당을 찍는 전술적 선택이 진보 진영의 불문율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비쳤었다. 그런데 그렇게 밀어주고 얻은 것이 무엇인가? 이 모양, 이 꼬라지의 정치다. '미워도 다시 한번' 인정을 볼모로-덫으로-지역주의 독버섯이 자라고 사부들의 선동주의가 판쳤다. 이제 그 과거를 정리하고 진보를 해방시키자!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