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21세기형 克日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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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전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있던 배일적(排日的)국민정서는 가위 폭발적 위력을 갖고 있음이 이번 독도(獨島)문제로 여실히 증명되었다.분노의 정도와 표현 또한 실로 다양하게 나타났다.일본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당장이라도 결단을 낼 것 같은 격앙된 분위기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대마도영유권 주장이나 심지어는 전쟁 불사론(不辭論)까지 대두된 형편이다.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흥분하게 만드는가.이미 독도문제는 우리의 뿌리깊은 대일(對日)반감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외교적 역량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국민적 정서의 결집이라면 우리 정부로서는 외교적 성공을 위한 든든한 배경을 가진 셈이고,국민들로서는 정부의 외교 전략 전개에 충분히 힘을 실어준 셈이다.오랜만에 정부와 국민이 가위 절묘 한 이중주를 연주해 협화음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향후 진행될 한.일간 어업협정도 그러하지만 국가간 문제는 다양한 현안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장기 레이스와 같다.
각종 전술과 자원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효과적으로 운용될 때 외교적 역량이 극대화된다.국민과 정부의 교감이 반 드시 정부관계자의 공식적 대응에 국민적 정서를 숨김없이 표출한다는 뜻은 아니다.국민정서의 결집이 외교적 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에 의미가있다. 무슨 일이든 적절한 업무분담이 효율성을 제고하듯,외교적대응태세도 마찬가지다.외교적 문제는 한 수의 통렬한 뺨때림으로단숨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각각의 단계에는 그 상황에 걸맞은연기자와 외교적 자원의 활용이 필요하다.물론 영토 문제에 관해정부가 결연한 의지를 미리 밝혀둔다는 점에 있어 대통령이나 정부가 취한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다만 일면 우려되는 것은 초반에 지나친 강수(强手)를 다 써버림으로써 다른 현안과 연계하려는 일본의 외교적 술수에 말려들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영토문제는 외교적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역사적으로 우리의 영토가 분명한 독도를 현시점에서 우리가 실효적으로 영유하고 있지 않은가.더욱이 오늘날의 세계정치는 영토문제를 둘러싼 무력분쟁 가능성을 현격히 감소시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왜우리가 전쟁불사의 분위기 속에서 최고조의 흥분을 표출하려 하는가.국제정치의 현실은 최근 국내에서 인기있던 소설처럼 전개되기는 어렵다.왜 굳이 그러한 소설에서 충동질 했던 배타적 민족주의를 감정적으로 표현하려 하는가.
그러므로 오늘날 한.일 관계의 현좌표를 다시 냉철하게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양국관계의 보다 중요한 외교적 현안은중.단기적으로는 어업협정의 개정을 위한 협상,무역불균형의 시정등 경제적 문제이며,장기적으로는 미.일 신안보체 제 구상을 비롯한 안보환경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안보관계의 재정립이다.또한 북.일 교섭과 관련해 일본의 행보(行步)를 적절히 조절해야 할 필요도 있다.
정부로서는 영토문제가 외교적 교섭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원칙만 고수하면 그 뿐,국민의 정서적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친 흥분으로 일관해서는 안될 것이다.국민들로서도 이젠 정부가 추진하는 외교적 과정을 차분하게 독려할 시점이다.일본으 로서는 이웃나라와의 관계가 원활하게 작동되지 않고서는 역내(域內)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다는 것이 일본내 중론이다.이를테면일본의 정치적 부상 과정에 우리가 중요한 지렛대를 쥐고 있는 셈이다.지렛대는 우리가 쥐고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 이렇게 흥분할 것인가.냉철한 시각으로 일본의 태도를 관찰하면서 우리의 이익을 챙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그것이야말로 21세기를 지향하는극일(克日)의 효과적 방편일 것이다.
김기정 연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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