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망명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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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망명(亡命)은 정치적 이유등으로 남의 나라로 몸을 피하는 일이다.쫓기는 자를 교회의 성역(聖域)에 숨겨주는 일은 고대(古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舊約)성서의 출애급기(23장 9절)편에도 『이방인(異邦人)을 박해하지 말지어다.
너희들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들이었으니 그 심정을 알지 않는가』라고 씌어 있다.
영어로 망명(asylum)은 몸을 숨길 장소다.「망명을 구(求)한다」는 표현도 이 때문이다.개인이 남의 나라에 망명을 요구할 국제법상의 권리는 없다.요구받은 나라가 그 망명을 허용할권리만 있을 뿐이다.
망명 허용에 관한 국가간 합의는 1951년의 유엔협약과 67년 이를 보강한 유엔의정서에 근거한다.유대인들의 비극 같은 것이 지구상에서 되풀이 돼선 안된다는 동기에서 비롯됐다.「인종적.종교적 또는 국적(國籍)상의 이유로,특정의 사회 단체에 소속하거나 정치적 견해 때문에 박해받을 위험이 객관적으로 입증될 때」 망명은 허용된다.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망명은 「냉전 정치(cold war politics)」의 한 도구로 변했다.발레리나.물리학자.조종사등옛소련 유력인사들의 잇따른 서방망명은 서방쪽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선전하는 유력한 무기였다.「계산된 친절 」에 입각한 「망명 공작(工作)」에 정보기관들은 열을 올렸다.「USA」가 아메리카합중국 아닌 「망명합중국」으로 불릴 정도였다.
냉전적 대결구도가 무너지면서 「망명의 정치」도 막을 내렸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제 입국의 구실로 정치적 망명을 내세우는 「사이비 망명자」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독일이 93년 7월부터 실시중인 「새 망명법」은 보호기간을 19일로 한정하고 신청서를 심사해 합격이 안되면 되돌려보낸다.미국도 94년3월부터 망명심사에 60일간 「신속처리」제도를 도입하고 판정받을 때까지 1~2년 머무르게 되는 편법을 없애버렸다.망명사유의객관적 검증요건도 날로 까다로워지 고 있다.
잠적한 북한의 성혜림(成蕙琳)이 망명을 요청토록 한국이 설득을 시도중이라는 보도들이 「망명의 정치」를 떠올리게 한다.잇따른 귀순(歸順)속에 북한당국을 쪽팔리게하는 「프로파간다 쿠데타」로 평가도 받지만 이 냉전적 접근방식이 남북한 관계의 전개에미칠 영향도 헤아렸으면 하는 아쉬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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