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온천을 오래한 탓인지 베개를 받친 아리영의 육신 속에서 그의몸가락은 크게 동하고 힘껏 불을 뿜었다.그 일치감이 아리영을 더할나위없는 쾌감의 정상에 서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육신을 나누고 쾌락을 동시에 누리는 일 이상무엇을 바랄 것인가.
서로 껴안고 자다 눈을 떴다.방안 탁자 위의 텔레비전이 산제(山祭)를 중계하고 있었다.스위치를 켜놓은 채 잠든 것이다.
우변호사를 깨우려다 말았다.
베개에 파묻혀 아리영 쪽을 향해 곤히 잠들어있는 얼굴.단정하면서도 소년처럼 앳된 티가 보인다.
사랑스러웠다.이 남자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브라운관 가득히 고마가타케(駒岳)정상이 비쳤다.하얀 제복(祭服)을 입은 신직자가 목판을 막대기로 맞비벼 얻은 불씨를 치켜올리며 하늘에 절한 다음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새벽의 묏부리에 힘차게 불길이 솟았다.장엄한 순간이었다.
아리영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불길을 지켜보고 있었다.지금 뭔가를 기구(祈求)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구는 단 한가지,우변호사와 함께 살 수 있게 되길 비는 일이다.그의 아이를 낳고 그와 함께 사는 일.그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것인가.
후드 달린 양털 코트를 입은 서양 남녀가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났다. 이자벨 내외였다.카메라는 산제에 참가한 여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낱낱이 훑어 비쳐내고 있었다.
산제에 안가기 잘했다고 생각했다.시동생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그도 어느 호텔이나 여관에서 이 중계를 보고 있을지모를 일이었다.아리영의 모습을 저 몇 안되는 구경꾼 속에서 발견하면 그는 분명히 의아해 할 것이다.따지러온 사람이 의심받는꼴이 될 수는 없다.
어떻든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할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택시를 불러 도쿄로 향했다.
호숫가의 찻길을 누비며 달리는데 산줄기 너머 하얀 후지(富士.ふじ)가 돋보였다.온통 눈으로 덮인 채 우뚝 솟은 해발 3천7백76의 세모난 산.일본서 가장 높다는 산이다.
고대엔 한자로 「불진(不盡)」이라 표기되었었다 한다.원래 활화산(活火山)으로 불을 뿜었었으나 그 후 줄곧 잠잠해서 「불 꺼진」의 뜻으로 「불진」 또는 「불지」라 불린 것이 「후지」로소리가 바뀐 것인가.일본의 지명 속엔 놀랄 만큼 많은 우리 옛말이 박혀있다.
도쿄로 돌아온 이튿날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시동생에게 전화했다.
글 이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