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불평등의 역사 바로 세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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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0년대초 작가 천승세(千勝世)는 소설 『황구(黃狗)의 비명』에서 의정부 기지촌 주변 여인들의 애처로운 삶을 재래종 황구에 비유해 그렸다.어마어마한 체구를 자랑하는 수캐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지르는 재래종 황구-.그것은 곧 미군병사를 상대로 몸을 파는 기지촌 여인들의 모습이었다.
해방되던 1945년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3년동안 「점령군」으로 군림했다.그들은 해방을 안겨준 시혜자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 7월 체결된 한미행정협정은 시혜자인미군에 특권을 주는 대표적인 불평등 협정이었다.당시 미국측은 주한미군이 죄를 짓더라도 구속수사권 등 형사권은 미국 군법회의가 갖는 반면 미군에 피해를 준 한국인은 미군이 구속할 수 있도록 해줄 것등을 요구했다.「내것은 물론 내것이고,네것 또한 내것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를 수정없이 수락했다.이승만(李承晩)정권은 미군의 한국전 참전에 감읍,실로 굴욕적인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0년이후 주한미군이 저지른 사고.범죄건수는 연평균 2천여건에 이르고 있다.그러나 이 협정의 체결로 미군병사가 한국의 부녀자를 겁탈하더라도 미군측이 동의하지 않는한 구속수사가 불가능했다. 1심판결이 불만스러워도 검찰은 상소조차 할 수 없었다.
가까운 이웃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일본은 구속수사권은 물론 상소권까지 행사하고 있다.일본은 주권국가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당당한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지 4반세기-.대한민국은 올림픽을 유치하고 무궁화호위성을 두개씩이나 쏘아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그래서 한.미 양국 고위층들은 이제 양국은 성숙한 동반자 관계임을강조한다.
그렇지만 미국민 우선의 행정협정은 그 대로 남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내를 희롱하는 미군에게 항의하다 뭇매를 맞아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미군측이 겨우 2백만원의 배상액을 결정한데 항의하며 혹한의 거리에서 텐트를 치고 13일동안 철야농성했던 이영직(李英直.24)씨사건(본지1월9일자 23면 보도)은 아 직도 주한미군은 이 땅에 「점령군」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이 사건과 관련,법무부는 8천1백만원을 배상하라는 판정을 내렸다.그러나 미군측은 이를 무시하고 치료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2백21만원을 배상액으로 결정한 것이다.한미행정협정상 법무부의배상판정은 강제력이 없는 공허한 희망사항에 불과 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우리 정부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이같은 불평등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15일부터 이틀동안 서울에서 열린 3차협상에서 우리측은 최소한 기소시점에서는 미군범죄자의 신병을 넘겨줄 것등을 요구했지만 의견차로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소식이다.
자국이익을 우선하는 국가이기주의는 한미행정협정 개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그러나 우리 의식속에 잠재된 성은망극(聖恩罔極)의 사대주의적 속성도 이에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곱씹어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미군의 주둔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그렇지만 그것이 불평등한 협정을 유지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이 돼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인간과 인간,국가와 국가간의 갈등과 대립은 불평등에서 비롯된다.때문에 부패한 역사청산 못지 않게 불평등의 역사청산도 중요하다.동구권의 몰락으로 평등의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는역사의 전환기에서도 어느 한 국가.국민의 특권만 인정되는 불평등조약이 우리 땅에 존속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결코 바로 설 수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때다.
김창욱 수도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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