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국가 영혼의 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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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가의 영혼으로 보자면 작금의 상황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안한 시위 사태다. 한 국가의 영혼은 국민의 영혼이다. 정권은 바뀌지만 국민은 영원하므로 국민의 정신이 반듯해야 국가는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를 이끌었던 시위 사태엔 크든 작든 빠짐없이 영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래서 위기인 것이다.

1960~70년대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라며 그때까지 민주주의는 참자고 했다. 재야·대학생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고 3선개헌에 맞섰으며 유신철폐를 외쳤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묵묵히 개발독재를 견뎠다. 5000년 가난을 떨쳐내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7년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사람들 얼굴에 윤기가 돌자 국민은 민주화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권은 강압으로 버텼다. 야당 총재를 제명하고 야당 당사에 찾아든 여공들을 폭력으로 끌어냈다. 그러자 국민은 외치기 시작했다. 대통령더러 이제는 그만 말에서 내리라고 했다. 79년 10월 부산·마산에서 파출소가 불에 탔고 끝내 대통령은 정보부장에게 피살됐다. 그해 10월의 시위엔 그렇게 영혼이 있었다.

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위 역사에서 가장 유혈적인 것이었다. 국민은 소리를 지르거나 돌만 던지는 게 아니라 총도 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투쟁을 주도했던 영혼은 지금 망월동 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역사는 5공 군부 집권으로 이어졌고 국민은 87년 끈질긴 독재와 최후대결을 벌이게 된다. 국민은 대통령직선제를 원했고 직선제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였다. 국민의 승리는 예정되었던 셈이다. 수많은 최루탄이 터지고 이한열 군의 피가 아스팔트에 흘렀지만 시위대는 대부분 비폭력을 외쳤다. 고립된 경찰이 개처럼 얻어맞는 일도 없었다. 87년 민주화 투쟁에는 이렇게 뚜렷한 영혼이 있었다.

독재가 끝나고 직선제 대통령이 들어섰지만 시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정권은 90년 1월 3당 합당이라는 독선과 오만으로 내달았다. 정통 야당과 호남 세력은 국토의 한쪽 구석으로 내몰렸다. 합당에는 내각제 합의가 숨어있었다. 권력자 몇몇이 나라의 장래를 재단한 것이다. 91년 대학가에선 학원 자주화 투쟁이 벌어졌고 4월 말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진압 경찰에게 맞아 사망했다. 대학생들의 화염병·쇠파이프에 동료들이 부상하자 흥분한 경찰이 쇠파이프를 휘두른 것이다. 시위로 전국이 달아올랐다. 극단주의에 사로잡힌 학생들이 분신자살을 이어갔고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내각제 포기를 선언했고 총리와 4부 장관을 경질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절제의 선을 지키지 못하고 오버(over)했다. 6월 초 대학교에서 과격 학생들이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를 뿌리고 발길질을 해댔다. 패륜 행위에 여론은 반전했고 시위 파도는 동력을 잃었다. 이 시위 사태엔 여러 한계가 있었다.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정권은 독재가 아닌 민주 정권이었다. 저항은 분신과 화염병, 쇠파이프로 내달려 스스로 도덕성을 잃었다. 그래서 91년의 시위는 ‘반쪽의 영혼’인 것이다.

한국의 시위 역사는 영혼과 반쪽 영혼을 거쳐 2008년 5~6월로 왔다. 이번 시위엔 무슨 영혼이 있는가. 5월 초 촛불문화제만 해도 깨끗하고 어린 영혼이 있었다. 비록 올바르지 못한 TV·인터넷·교사에게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의 먹거리 시위는 엉성한 정권에 일침을 놓았다. 대통령이 반성하고 정부가 고치면서 그들은 대부분 학교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운동가·시민단체·노조·대학생, 그리고 세상에 불만이 많은 이들이 경찰과 언론과 상인을 패고 있다. 건국 40년 만에 민주주의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국가의 영혼을, 민주주의 수혜자인 시위대가 마구 패고 있다. 국가 영혼의 비명이 가슴을 찌른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