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으로 치면 단타 매매로 큰 돈 버는 고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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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12면

러시아인들은 요즘 6월에 태어난 아기에게 ‘거스’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거스 히딩크(62). 러시아를 흔드는 히딩크 신드롬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한국인들도 6년 전 경험한 일이니까.

언제나 4강 신화서 멈추는 히딩크의 리더십

히딩크는 스위스·오스트리아가 공동주최한 2008 유럽선수권대회에서 또 한번 ‘마술쇼’를 선보였다. 러시아를 4강으로 이끈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에 세 골 뭇매를 맞고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마치 1998년 프랑스월드컵(네덜란드), 2002년 한·일 월드컵(한국), 2002~2003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인트호번)에서 봤던 재방송 같다.
쇼는 끝났다. 빈의 빗줄기에 머리를 적신 채 고개 숙인 히딩크를 보며 슬며시 의심이 머리를 쳐든다. 또 여기까진가? 그의 마법은 왜 4강전에서 늘 풀리는가?

‘히딩크표 마술’은 동기부여, 체력 제일주의, ‘족집게 과외’로 요약된다. 히딩크는 선수의 잠재력을 100% 이상 끌어내는 지도자다. 선수들 스스로 변화하도록 만드는 지도력이 마법의 원천이다.

그는 ‘네덜란드 축구 상인’답게 이름보다는 실리(=실력)를 외치며 선수끼리 무한경쟁을 유도한다. ‘숨은 진주’를 찾는 솜씨도 뛰어나다. 2002년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찾아낸 그가 이번엔 알렉세이 아르샤빈(러시아)을 발견했다.

그는 마음을 읽는다. 2002년, 그는 한국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의 큰 체격에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의 신체 정보를 꺼냈다. 그리고 “너희 체격은 클라우버트보다 좋다. 이탈리아 델 피에로는 작지만 축구는 최고다”고 외쳤다.

히딩크의 파워 프로그램은 독보적이다. 한 선수가 90분 동안 200번 압박할 수 있는 체력, 격하게 움직여도 30초 안에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든다. 히딩크 마법이 후반에 강한 이유다. 유로 2008에서도 네덜란드를 맞아 연장전에서 2골을 몰아치며 역전드라마를 완성했다.

그런데 이 체력이 종점까지 가기는 어렵다. 체력이 한계에 오면 기량차를 느끼고, 그럼 자신감도 사라진다. 마법이 허무하게 풀리고 마는 것이다. 스페인과의 경기 후반은 히딩크 마술의 밑천을 보여준다.

결국 그는 단기 토너먼트 대회에서의 화제 메이커인 것이다. 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에서 세계 최강 헝가리를 깨고 우승한 독일(이 경기는 마술이 아니라 ‘베른의 기적’으로 불린다)과 같은 챔피언을 만드는 주술사는 아니다.

히딩크는 주식으로 치면 단타 매매로 차익을 만드는 귀재다. 반면 연간 수십 경기를 치르는 빅리그 실적은 내세울 게 없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를 맡았지만 6개월 만에 짐을 쌌다. 그런 점에서 히딩크는 20년 넘게 맨유를 지휘해온 알렉스 퍼거슨과 비교된다.

퍼거슨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등 세계 최고의 스타들을 떡 주무르듯 한다. 그러나 유소년 발굴과 유망주 영입을 통해 팀의 기초체력을 다지기를 잊지 않는다. 그의 장수 비결도, 단기전(챔피언스리그)과 장기전(프리미어리그)을 석권한 맨유의 저력도 여기서 나왔다.

사실 투자나 마술에도 재료가 필요하다. ‘맨땅에 헤딩’은 결과가 뻔하다. 히딩크의 마술은 절묘하게 재료를 감별해 내는 데서 시작된다. 2002년의 한국은 개최국의 이점에다 거국적인 지원이 보장된 곳이었다. 그의 임무는 16강, 최악의 경우 ‘비원의 1승 달성’이었다.

호주는 74년 이후 32년 만의 본선 진출이 목표였다. 러시아는 변방의 약체가 아니라 유럽선수권 원년 우승에 빛나는 옛소련의 혈통을 잇는 전통의 축구 강호다. 제니트의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에서 보듯 국내 리그가 튼튼하고 선수층도 두텁다. 히딩크가 맡을 만했다.

히딩크는 재료의 유전자를 바꿔서라도 목적을 이루려 든다. 농부라면 지력(地力)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작물 재배자다. 그런데 그가 마술로 둔갑시킨 신데렐라는 자정 넘어 마술이 풀리면 푸석푸석해진다. 마약에서 깨어나듯.

2002년, 대표팀은 1년6개월간 K-리그의 희생 속에 장기 합숙·해외 전지훈련 등 상상을 초월한 지원을 받았다. 히딩크가 떠난 뒤 한국 축구는 극심한 금단증상에 시달렸다. 월드컵 4강 팀이 이듬해 여러 수 아래인 오만·베트남·예멘에 참패하고 몰디브와도 비겼다.

그러나 히딩크는 부작용을 미리 말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엔 ‘팀에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어려웠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러시아가 4강에서 멈추자 한국이 그랬을 때처럼 “전통적인 강팀과의 차이이며 경험이 부족한 결과”라고 말했다.

히딩크는 유목민과도 같은 숙명을 지닌 승부사인 것 같다. 그에게는 기사 작위를 받은 퍼거슨과 같은 성(城)이 없다. 그런 그가 2010년까지 러시아 감독을 맡는다고 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그의 새 목표다. 히딩크는 2년 뒤 한계를 극복하고 마술을 완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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