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춤의 판타지 '바람의전설' 박정우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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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34)는 지난 13년간 충무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 '신라의 달밤''광복절 특사''주유소 습격사건''라이터를 켜라''선물'이 동원한 관객은 도합 1500만명. 이쯤 되면 그가 나무에서 떨어지길 은근히 바라고 있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9일 개봉하는'바람의 전설'은 그가 시나리오를 쓰고, 처음 메가폰까지 잡은 작품이다. 영화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춤을 배운 끝에 최고 경지에 올랐으나, 춤출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춤방'을 드나드는 제비 아닌 제비 '박풍식'의 인생 이야기다. 이번에도 박정우는 성공이란 나무 꼭대기에 별탈없이 이르게 될까. -춤 영화라는 장르가 독특하다. 그러나 춤 실력을 제대로 갖춘 배우가 흔치 않은 상황에서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나. "처음에는 안무 지도를 맡은 샤리 권 선생도 반대했다. 그런데 내가 좀 독한 구석이 있다. 아침마다 이성재.박솔미.김수로에게 전화 걸어서 춤 연습 안 가느냐고 닦달을 했다. 세 사람이 프로근성 있는 배우들이니까 견뎠지 웬만한 배우였다면 두 손 들었을 거다. 그렇게 열심히 했더니 어느 순간 샤리 권 선생도 흔쾌히 승낙할 만큼 '그림'이 나왔다." -재치 있는 대사가 넘치고 블랙 코미디 성격까지 띤 전작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당신이 감독으로 데뷔한 이번 영화에서는 이런 성격이 많이 휘발된 것 같다.'박정우 영화'라는 기대를 안고 왔다가 실망하지 않을까. "재미는 덜 하더라도 여운이 오래 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신라의 달밤'까지는 할 만했다. '라이터를 켜라'부터는 '대사발'로만 밀고 나가기가 힘겨웠다. '광복절 특사'는 정말 맡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김상진 감독.박정우 각본' 은 일종의 코미디 영화의 브랜드가 됐더라. 아류작도 많이 나왔다. 우리더러 코미디 영화를 치고 박고, 개그쇼처럼 말발만 세우는 것으로 전락시켰다고 욕도 많이 했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동안 해온 코미디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더 이상 거기에만 머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춤에 미친 박풍식을 연기한 배우 이성재는 영화속에서 룸바.왈츠.자이브 등 다양한 춤을 선보인다. -입담으로 관객의 혼을 빼는 캐릭터는 김수로가 연기한 제비 '만수'에게서 묻어나더라. "만수의 대사에 신경 쓴 곳이 많다. '나 제비 아니야'라고 외치는 풍식(이성재)에게 '그럼 니가 갈매기야, 까마귀야, 도대체 정체성이 없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풍식도 여태껏 내가 쓴 영화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어떤 한가지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풍식은 전국을 떠돌며 춤을 배운다. 전재산인 라이터 때문에 사생결단하는 허봉구(김승우)와 닮지 않았나." -춤 속에 열정이 담겨 있고, 춤을 추다 보면 세상 고민을 잊고 안식을 얻는다는 설정은 일본 영화 '셸 위 댄스'를 떠올리게 한다. "'셸 위 댄스'는 끝까지 보지도 못했고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만약 내 영화가 '셸 위 댄스'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는다면 내 공력이 달려서일 것이다. 이번 영화는 배우의 연기부터, 장면(미장센)들까지 내가 생각한 것은 거의 다 풀어냈다. 주위에서는 영화의 러닝 타임이 길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뭘 잘했고, 잘못했는지 제대로 알려면 첫 작품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고 믿었다. 연극 배우나 뮤지컬 배우 등 생판 모르던 이들도 일부러 기용했다."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은. "풍식이 거지에게 춤을 배우는 방파제 장면이다. 사계절이 다 느껴지도록 눈발도 날렸다. 최고의 장면을 뽑기 위해 1주일 이상 걸렸다. 홍콩에서 찍은 선상에서의 댄스 장면도 있다. 다들 비용이 많이 든다며 반대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은 멋진 배경에서 황홀한 춤으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운좋게도 때마침 구정 연휴라 불꽃놀이가 펼쳐져 환상적인 장면을 얻을 수 있었다." -주연인 이성재와의 사이가 각별하다고 들었다. 그런 관계가 영화 작업에는 득인가 실인가. "이성재한테서 전화가 오면 아내가 '애인!'이라며 바꿔준다. 사는 집도 바로 이웃이다.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현장에까지 이어지면 곤란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난 감독으로, 이성재씨는 배우로 선을 잘 지키는 편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다. 내가 성재보고 '넌 맨날 뻔한 연기만 하느냐'고 하면 곧장 '연출이 뻔하니까'라는 답이 날아온다." -감독 일을 계속할 것인가. "모두들 나를 성공한 작가로 기억하지만 첫 작품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 두번.세번 계속 만들 것이다. 또 앞으로의 영화에는 언제나 사회비판적 요소를 담을 것이다. 아, 마지막으로 제발 작가 박정우는 잊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글=홍수현,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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